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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로 Nov 11. 2021

나는 미술 비전공자입니다

오늘부터 1일, 오일파스텔


글감을 모으는 아이디어 노트나 드로잉북까지도 첫 페이지는 꼭 (이따금 둘째 페이지까지도) 비우고 쓰는 습관이 있다. 맞닿는 표지 부분이 더러워지는 것이 싫은 이유가 제일 크지만, 시작에 관한 두려움을 늘 안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 페이지를 말끔하게 풀어내야만 끝까지 잘해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약간의 강박.


브런치의 첫 발행 글도 사실 텅 빈 페이지를 올리고 싶었다. 내가 쓰고 싶은 글감은 리스트업 해놓았지만(=직업병), 어떤 식으로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9년 차 방송작가의 업으로써 나의 글은 육아, 건강, 시사, 뷰티 정보였는데 이제야 진짜 '나의' 글을 써보려 하니 정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닌 것이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어투부터 주제, 발행 글의 방향성, 가독성을 위해 단락을 어떻게 나누면 좋을지까지도 고르고 골라야만 했다. 이러다간 서랍 속 저장 글만 가득 쌓인 채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아 프롤로그와 최근 가장 마음에 든 그림 하나를 우선 올렸다.


이토록 시작이 어려운 사람이지만,
어쨌든 시작했다 :)


집순이 중에서도 활동적 집순이(?)에 속하는 나는 집에서 혼자 사부작 거리는 걸 참 좋아한다. 2019년 그런 나를 밖으로 이끌어낸 것이 있다면, 원데이 클래스. 퇴근 시간이 일정치 않은 방송일 특성상 내가 쉬는 날 원하는 수업을 받을 수 있다니 부담 없이 앱 속 다양한 분야의 원데이 클래스들을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가끔은 친구와 함께, 대다수는 나 혼자. 보기엔 예쁘지만 쓰기엔 꺼림칙한 비누 만들기, 한 땀 한 땀 엮어 손가방 만들기, 마카롱이나 스콘을 만드는 베이킹, 캘리그래피, 펜화, 동양화, 과슈화, (아무도 모르게) 댄스 클래스까지도 섭렵했다. 하지만 그 어떤 수업도 재수강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동양화, 캘리그래피, 과슈화 원데이 클래스


그중 운명처럼 이거다 싶었던 것이 오일파스텔이다.


오일파스텔을 처음 만난 클래스에서는 사실 오일파스텔을 주재료로 다루는 수업은 아니었다. 블라인드 컨투어 드로잉[내 작품을 보지 않고, 그리는 대상에 눈을 고정한 채 윤곽을 이어 그리는 방식] 수업에서 채색 도구로 준비된 재료 중 하나였다.


5~6명쯤 모인 수업에선 수강생들이 돌아가며 모델이 된다. 맨 앞 의자에 앉아 모델이 된 이에겐 모든 시선이 꽂힌다.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내 눈은 모델에게 고정, 펜을 잡은 손은 종이에 고정. 이마에서 타고 내려온 선은 눈썹, 눈, 코, 입, 턱을 타고 귀(귀걸이)를 지나 머리카락과 옷에서 착지. 한 선이 그만의 특징을 살린 한 작품으로 거듭난다. 의도와는 달리 모여라 눈코입이 될 수도 있고, 목걸이가 정수리에 붙어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제 나름의 스타일. 얇은 펜으로 스케치를 끝낸 후에는 채색을 위해 오일파스텔을 잡았다. 색연필이나 파스텔을 사용하는 사람, 오일파스텔로 바탕색을 빽빽하게 칠해내는 사람도 있었고 색을 칠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색을 골라 옷과 입술, 배경 일부에 포인트 채색을 했다.


오일파스텔과 처음 만난 블라인드 컨투어 드로잉 클래스


이날 이후로 오일파스텔에 푹 빠져버렸는데 어른의 크레파스 같은 근사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평소 유화의 한 질감을 좋아했던지라 내 손으로 (비교적) 쉽게 질감표현해 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다. 나중에 미술 이론 책에서 보니 내가 좋아했던 것은 임파스토 기법이었는데, 이탈리아어 impastare(반죽하다)에서 유래한 임파스토는 두껍게 칠한 물감을 뜻한다고 한다.


오일파스텔 원데이 클래스는 꽤 여러 곳을 다녀보았고, 점점 더 그 매력에 스며들었다. 몇 번이고 다시 찾게 되는 클래스도 생겼다. 그곳에선 내가 모작하고 싶은 명화를 골라 오일파스텔로 그려볼 수 있는데 3시간이 30분처럼 흘러가고, 완성된 내 그림을 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든다. (무한 칭찬으로 자신감을 심어주는 좋은 선생님을 만난 덕분!) 뿌듯하다, 행복하다, 이렇게 상투적인 표현밖에 떠오르는 내가 조금 싫지만 정말 그 자체였다.


오일파스텔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나는
뿌듯하고 행복한 모양이었다.


최애 오일파스텔 원데이 클래스 :: 인생 사진은 덤


미술 비전공자인 나에게 어디서 이런 그림에 대한 욕망 같은 것이 숨어있었던 건지 주변인들은 물론 나 조차도 놀라게 했다. 만약  전공이었다면 마냥 홀가분하게 그리지 못했을 나를 안다. 그 어떤 중압감도 없는, 그림을 즐길 준비가 된 상태에서 오일파스텔을 만난 것이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오래전 뽀시래기 막내 작가 시절 한 메인 작가 선배님께서 쉬는 날 미술 학원을 다니신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아마 어렴풋이 그 동경이 가슴에 남아있었을 수도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 화가가 꿈이었던 초등학생의 한풀이(?)일지도 모르겠다. 비전공자의 느낌적인 느낌을 살려 투박한 날것의 그림을 그려야겠다 싶었다. 그리곤 결심했다.


이제 집에서 나 혼자 그려보자고.



@___soro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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