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을 모으는 아이디어 노트나 드로잉북까지도 첫 페이지는 꼭 (이따금 둘째 페이지까지도) 비우고 쓰는 습관이 있다. 맞닿는 표지 부분이 더러워지는 것이 싫은 이유가 제일 크지만, 시작에 관한 두려움을 늘 안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 페이지를 말끔하게 풀어내야만 끝까지 잘해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약간의 강박.
브런치의 첫 발행 글도 사실 텅 빈 페이지를 올리고 싶었다. 내가 쓰고 싶은 글감은 리스트업 해놓았지만(=직업병), 어떤 식으로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9년 차 방송작가의 업으로써 나의 글은 육아, 건강, 시사, 뷰티 정보였는데 이제야 진짜 '나의' 글을 써보려 하니 정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닌 것이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어투부터 주제, 발행 글의 방향성, 가독성을 위해 단락을 어떻게 나누면 좋을지까지도 고르고 골라야만 했다. 이러다간 서랍 속 저장 글만 가득 쌓인 채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아 프롤로그와 최근 가장 마음에 든 그림 하나를 우선 올렸다.
이토록 시작이 어려운 사람이지만, 어쨌든 시작했다 :)
집순이 중에서도 활동적 집순이(?)에 속하는 나는 집에서 혼자 사부작 거리는 걸 참 좋아한다. 2019년 그런 나를 밖으로 이끌어낸 것이 있다면, 원데이 클래스. 퇴근 시간이 일정치 않은 방송일 특성상 내가 쉬는 날 원하는 수업을 받을 수 있다니 부담 없이 앱 속 다양한 분야의 원데이 클래스들을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가끔은 친구와 함께, 대다수는 나 혼자. 보기엔 예쁘지만 쓰기엔 꺼림칙한 비누 만들기, 한 땀 한 땀 엮어 손가방 만들기, 마카롱이나 스콘을 만드는 베이킹, 캘리그래피, 펜화, 동양화, 과슈화, (아무도 모르게) 댄스 클래스까지도 섭렵했다.하지만 그 어떤 수업도 재수강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동양화, 캘리그래피, 과슈화 원데이 클래스
그중 운명처럼 이거다 싶었던 것이 오일파스텔이다.
오일파스텔을 처음 만난 클래스에서는 사실 오일파스텔을 주재료로 다루는 수업은 아니었다. 블라인드 컨투어 드로잉[내 작품을 보지 않고, 그리는 대상에 눈을 고정한 채 윤곽을 이어 그리는 방식] 수업에서 채색 도구로 준비된 재료 중 하나였다.
5~6명쯤 모인 수업에선 수강생들이 돌아가며 모델이 된다. 맨 앞 의자에 앉아 모델이 된 이에겐 모든 시선이 꽂힌다.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내 눈은 모델에게 고정, 펜을 잡은 손은 종이에 고정. 이마에서 타고 내려온 선은 눈썹, 눈, 코, 입, 턱을 타고 귀(귀걸이)를 지나 머리카락과 옷에서 착지. 한 선이 그만의 특징을 살린 한 작품으로 거듭난다. 의도와는 달리 모여라 눈코입이 될 수도 있고, 목걸이가정수리에 붙어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제 나름의 스타일. 얇은 펜으로 스케치를 끝낸 후에는 채색을 위해 오일파스텔을 잡았다. 색연필이나 파스텔을 사용하는 사람, 오일파스텔로 바탕색을 빽빽하게 칠해내는 사람도 있었고 색을 칠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난 내가 좋아하는 색을 골라 옷과 입술, 배경 일부에 포인트 채색을 했다.
오일파스텔과 처음 만난 블라인드 컨투어 드로잉 클래스
이날 이후로 오일파스텔에 푹 빠져버렸는데어른의 크레파스같은 근사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평소 유화의 띡한 질감을 좋아했던지라 내 손으로 (비교적) 쉽게 질감을 표현해 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다. 나중에 미술 이론 책에서 보니 내가 좋아했던 것은 임파스토 기법이었는데, 이탈리아어 impastare(반죽하다)에서 유래한 임파스토는 두껍게 칠한 물감을 뜻한다고 한다.
오일파스텔 원데이 클래스는 꽤 여러 곳을 다녀보았고, 점점 더 그 매력에 스며들었다. 몇 번이고 다시 찾게 되는 클래스도 생겼다. 그곳에선 내가 모작하고 싶은 명화를 골라 오일파스텔로 그려볼 수 있는데 3시간이 30분처럼 흘러가고, 완성된 내 그림을 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든다. (무한 칭찬으로 자신감을 심어주는 좋은 선생님을 만난 덕분!) 뿌듯하다, 행복하다, 이렇게 상투적인 표현밖에 떠오르는 내가 조금 싫지만 정말 그 자체였다.
오일파스텔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나는 뿌듯하고 행복한 모양이었다.
최애 오일파스텔 원데이 클래스 :: 인생 사진은 덤
미술 비전공자인 나에게어디서 이런 그림에 대한 욕망 같은 것이 숨어있었던 건지 주변인들은 물론 나 조차도 놀라게 했다. 만약내 전공이었다면 마냥 홀가분하게 그리지 못했을 나를 안다. 그 어떤 중압감도 없는, 그림을 즐길 준비가 된 상태에서 오일파스텔을 만난 것이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오래전 뽀시래기 막내 작가 시절 한 메인 작가 선배님께서 쉬는 날에 미술 학원을 다니신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아마 어렴풋이 그 동경이 가슴에 남아있었을 수도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 화가가 꿈이었던 초등학생의 한풀이(?)일지도 모르겠다. 비전공자의 느낌적인 느낌을 살려 투박한 날것의 그림을 그려야겠다 싶었다.그리곤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