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통하지 않는데 통하는 사이

by 박소록



말을 할까 말까 고민된다면 하지 말라 했던가. 말을 주고받는다고 전부 대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꽉 막힌 벽에 입술만 달린 것 같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도 한다. 서로 언어가 통하는데, 아니 서로 언어가 통하는 바람에 누군가의 과녁을 아프게 관통하는 말을 던질 수도 있다. 직장에서는 너무 많은 말을 한다. 가끔은 퇴근할 무렵이면 말을 너무 많이 해 목소리가 붕 떠있을 때도 있다. 할까 말까 고민하다 해버려서 후회되는 말도, 하지 않아서 돌덩이처럼 맘을 무겁게 누르는 말도, 누군가의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도, 누군가가 삼켰을 말도 사람들 틈에서 하루 종일 있다 보면 어지럽게 쌓인다. 제자리를 찾지 못한 물건들처럼.


그렇게 집에 온다. 모국어가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집에 온다. 그렇게 멘보샤 아가씨와 재회한다.

아가씨는 뭐랄까, 무지막지 테토견이라 원하는 게 있으면 낑낑거리거나 애교를 부린다기보다 우렁차게 짖는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왕왕 짖는다. 나를 보자마자 나의 의무와 자신의 권리를 깨달은 것 같다. 나는 의무를 다하며 아가씨의 끼니를 챙긴다. 방금 내게 짖은 건 밥 달라는 거겠지, 하며. 일단 밥부터 주고 소파에 슬쩍 누워 있으면 또 왕왕 짖는다. 이건 약 달라는 거겠지. 강아지용 츄르에 가루약을 섞어주는데 입맛이 예민한 강아지는 아닌지 약인 줄도 모르고 그저 간식인 줄 안다. 그러니까 철저히 아가씨 입장에서 보면 간식 달라는 얘기다. 이 조그만 게 매일 하는 많은 루틴마다 달면 얼른 삼키고 쓰면 어떻게든 뱉으려 하는 거 보면 웃겨 죽겠다. 양치는 죽어도 하기 싫어하면서 이런 루틴은 알아서 챙기려고 든다. 부스럭 일어나 부엌에서 약을 준비하면 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저건 얼른 달라는 거겠지. 네 츄르에 약을 탔다, 이놈아 하고 내어 주면 그릇을 벽에 닿을 때까지 밀어내며 열심히 먹는다. 그 사이 할 일을 하고 있으면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끈질기게 나고 그렇게 스스로 그릇을 깨끗이 설거지한 후에는 이부자리에 먼저 올라가 세수를 한다.


한참 아가씨를 잊고 일하다 보면 또 어디선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난다. 앗, 저건. 물그릇 엎는 소리. 물이 없다는 얘기다.

늘 고만고만한 표현들로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는데 아가씨가 가끔 새로운 표현 방식을 터득할 때가 있다. 언젠가부터 물이 없고 물이 없다고 몇 번 표현을 했음에도 내가 알아듣지 못하면 물그릇을 엎어 버린다. 그것만큼 확실한 표현 방식은 없다는 듯, 요즘은 몇 번 표현도 하지 않고 물그릇을 엎어서 의사를 전달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거대 생물과 사는 느낌은 어떨까? 종종 궁금했는데 아가씨도 아가씨 나름대로 답답해하며 의사를 똑바로 전달할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모양이다.

또 생각나는 게 있다. 아가씨는 귀가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들어 안아 둥가둥가해주고 있을 때 다른 한 명이 이리 와하면 거기로 가겠다는 듯 앞발을 쭉 내민다. 안아달라고 팔 벌리는 사람처럼. 그런 의사표현은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는 터득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가씨도 나에 대해 ‘이제 좀 알겠군 ‘ 싶을 때가 있을까. 답답하게 껴안을 때, 그게 사랑이란 걸 알까. 쪽쪽거리는 뽀뽀가 애정표현인 것을 알까. 의도와 의미가 엇갈리고 서로를 이해시키기 위해선 시간을 쏟아 한참 들여다봐야 하는 방식의 느리고 느린 의사소통. 껴안는 것보다는 엉덩이를 긁어주는 게, 뽀뽀보다는 산책 가자는 말이 아가씨에게는 더 와닿는 애정표현이라는 걸 사실 나도 잘 알고 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제자리를 찾지 못한 말을 어디에 어떻게 두면 좋을지 오랜 시간 탐색한다. 꼭 맞는 자리를 신중하게 고른다. 물그릇 엎는 소리가 날 때마다 그 의도와 의미가 딱 맞아떨어지는 아가씨의 의사표현이 너무 명쾌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된다. “똑똑한 녀석이야. 아주 똑똑해, 가르친 적도 없는데. 이러다 정말 대학까지 가겠어.” 하면서.


오늘도 시끌벅적한 세상에서 겨우 빠져나와 내 등 뒤로 현관문이 닫히고 나면 체계가 헐겁고 느슨한 이 오래된 의사소통 방식뿐인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아가씨는 왕왕 짖고, 오늘도 물그릇을 엎었다.



엎어진 물그릇…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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