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할부금도 갚아보지 못한 에어팟이 무지개다리를 건너버렸다. 그러니까, 집에서 계단으로 내려오며 가방을 뒤적거렸는데 뭔가가 툭 튀어나왔다. 허연 것이 데구루루 굴러 차도로 떨어졌다. 그 순간 그 허연 것 위로 자동차 바퀴가 지나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밟혔다. 밟히고 난 뒤에야 ‘저게 내 에어팟 본체인가?’ 생각했다. 그 모든 장면과 생각의 떠오름이 0.5배속으로 느리게 스쳐갔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느리적 느리적 도로에 다가가 내 에어팟이었던 일그러진 허연 것을 주워 들었다. 이상하게 어떤 감정도 스치지 않았다. 내 마음 어딘가 커다란 구멍이 생겨서 발생하는 모든 감정이 그 구멍 안으로 휘리릭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 약속 시간에 이미 살짝 늦었는데, 이런 일이.
난 사체를 들고 급히 발길을 옮겼다. 보컬레슨 OT에 가던 참이었다. 일상의 다른 파트에 이미 좋지 못한 이슈가 있어 이틀을 꼬박 삶은 달걀 2개로 견뎠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을 지경으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그러던 참에 산 지 2주 된 에어팟이 그렇게 저승에 갔다.
이런 쓰레기 같은 코미디가 있나. 망가진 에어팟을 들고 빠르게 걷다 어이없어 멈추기를 반복하는 바람에 결국 지하철을 하나 놓쳐 OT에 지각했다. 보컬선생님이 첫 약속을 당일 파투 낸 전적이 있어 그런지 내가 잔뜩 땀 흘리며 죄송한 얼굴로 들어갔을 때 “제가 더 죄송했어요.” 하며 오히려 후련해 보여서 나 혼자 ‘우린 이제 쌤쌤’ 하고 생각하고 말았다.
에어팟 알맹이는 그때 내 귀에 있어 사고를 면했다. 그때 최근 좋아해서 한곡반복으로 듣는 밴드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울지 마, 믿어. 네 눈물을 닦아줄 수 있다면 거짓말쟁이라도 될게. 이 밴드의 보컬은 현재 내 최애다. 어느 정도냐면 다음 생의 장래희망을 남자락밴드보컬로 정해버릴 정도, ‘이번 생 열심히 살아서 저 성대, 다음 생에는 내 거로 만들어버리겠어!’ 할 정도였다. 사랑하지 않기에는 노래하는 목소리가 너무 미쳐버린 것(p).
저 노래가 최애곡인데, 이상하게 이 노래를 좋아한 뒤로 눈물 나는 일만 생긴다. 어마무시한 분량의 단체주문이 갑자기 생긴다거나, 뇌리에 남은 진상 오브 진상을 만난다거나 강아지가 급성백내장에 걸린다거나 찰나의 실수로 흘린 에어팟 본체가 차도로 떨어진 순간 바퀴의 궤적에 정확히 놓여 으스러진다거나. 하. 사실 좋아하는 라이브 공연 영상 속 보컬의 성대 상태가 최상이라 듣다 보면 ‘이 목소리가 내 눈물을 닦아준다면 그깟 눈물 흘려주지.‘라는 뒤틀린 애정이 생기는데, 그런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진짜, 근데 아니 진짜로 이러기야? 기막힌 타이밍으로 에어팟이 사망하는 순간, 귀에 꽂혀있던 에어팟에서는 역시나 저 가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야이, 진짜 닦아줄 것도 아니면서.
보컬레슨은 전부터 다시 받고 싶었는데 질러버리게 된 계기도 이 보컬 때문이었다. 무대 위 모습이 청춘 그 자체였다. 락밴드보컬이 늙지 않는 이유를 깨달아버린 것 같았다. 자유로운 객기가 청춘의 퍼스널 컬러 같다고 느낄 정도로. 아, 그 영상 속 보컬은 너무나 자유로워 보인다. 이 사람의 한창때를 너무 사랑한 사람은, 그래서 저 라이브를 실제로 가서 본 사람은 이 생에 괜히 복권 같은 거 사지 마라. 안될 테니까. 그대는요, 저기에 운을 너무 많이 소비했어요. 실은 부러워서 하는 말이에요. 꽤 질투 나요.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닌지, 라이브 영상 댓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한 사람의 청춘을 빌려 행복했으니 어떤 모습이라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작가로 만드나 봐. 어떻게 저런 사랑고백을 할 수 있지. 이것 역시 꽤 질투 나요.
OT는 재밌었다. 곡은 좋아해서 자주 부르는 J-Pop 곡으로 했다. 안 좋은 버릇을 못 찾겠다고 해서 다른 노래도 불러봤는데 내 호흡 문제를 지적해 주셨다. 얘기를 찬찬히 듣고 내 나름대로 고쳐 불렀더니 훨씬 노래가 들을 만해졌다. 배우는 일은 이게 재밌다. 어떻게 하는 건지 머리로는 이해가 덜 됐는데 출력이 될 때가 있다. 근데 그때를 기억해서 의도적으로 하려고 하면 또 안돼. 습관이 될 때까지 반복해야 내 것이 돼. 지름길 같은 건 찾으려고 하면 안 보이는데 지름길을 생각하지 않고 무식하게 앞만 보고 나아가다 보면 갑자기 눈앞에 지름길이 보여. 무언가를 배울 때마다,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자유로워지려면 잘해야 돼. 잘하려면 나를 구속해서 끝의 끝까지 쥐어짜야 해. 욕구까지 가는 길이 욕구를 너무 배반해.
보컬레슨은 일단 등록하기로 정했다. 이생에 남자락밴드보컬은 못 되더라도 락커가 되어 저속노화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