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10
‘매주 도서관 가는 일기’는 도서관 바로 앞에 위치한 카페에서 쓴다. 도서관 맞은편에 위치한 적당한 크기의 카페인데, 음료도 맛있고 분위기도 좋고 조명도 예쁘다. 무엇보다 어른들은 물론이고 어린이들과 반려동물도 이용할 수 있는 카페라는 점에서 무척 좋아하는 장소이다.
매주 주말 오전에 이 카페에 앉아서 책도 읽고 독후감도 쓴다 보면 어린이 손님들을 많이 만난다. 한 번은 빈자리를 2개쯤 사이에 두고 한 가족이 앉아있었다. 아이는 부모님의 대화가 지루했는지 다리를 흔들다가 빈자리를 하나, 둘 통과하더니 내 바로 옆 테이블에 털썩 소리 내며 앉았다. 에어팟을 끼고 있었으나 어린이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위협적인 어른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활짝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아이도 따라 웃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우리는 소리 내서 대화하지는 않았으나 진지하고 정중한 관계를 맺었다. 아쉽게도 아이의 어머니는 내가 키보드를 한창 두드리고 있던 것을 보았는지 ‘방해하면 안 돼~’라고 달래어 새 친구를 제자리로 데려갔다. 아이는 먼 자리에서도 이따금 내게 시선을 돌렸고, 눈이 마주치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에게 손을 흔들거나 킥킥 웃었다.
온라인에서 ‘노 키즈 존’에 대한 대립이 팽팽하다. 나는 어린이가 아니고 양육자도 아니기 때문에 노 키즈 존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가며 아이들을 환영하지 않는 사업장들이 아주 큰 잘못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포장을 해도 혐오는 혐오, 차별은 차별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나는 혐오와 차별을 조장한다’고 인정하고 노 키즈존 간판을 달았으면 좋겠다.
<어린이라는 세계>는 어린이 독서교실을 운영하는 김소영 작가의 에세이다. 어린이 책 편집자로 일하다가 독서교실을 운영하는 사람이니 자연스럽게 어린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책을 읽는 내내 반성도 많이 하고 카페에서 눈물을 찔끔 흘리기도 했다. 재미와 감동, 교훈까지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책이었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어린 시절을 통과한 이래 그 어떤 어린이와도 접점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아이는커녕 결혼한 친구조차 많지 않고 (애초에 친구가 별로 없다), 친척도 적은 편인 데다 가족 중에도 아이가 있는 집이 없다. 그래서 어린이를 대하는 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아주 무례한 어른이다. 아이들에게 무의식적으로 반말을 했고(얘, 엄마는 어디 있니?), 무작정 귀여워했으며(네가 하려고? 아유 귀여워!), 얌전한 아이들만을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저런 애들은 왜 저러나 몰라, 쯧!)했었다. 내게 아이들을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은 차라리 천운이다. 나쁜 영향을 이리저리 퍼뜨리고 다녔을 걸 생각하면 오싹해진다.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지 않았더라면 나의 태도가 잘못된 것도 모른 채로 나이를 먹을 뻔했다. 이제라도 따끔히(?) 혼이 나서 정말 다행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남의 집 어른> 에피소드에 나오는 어린이의 사랑에 관한 글이다.
그랬을 것이다. 연두처럼 나도, 엄마의 감기약이 식을까 봐 약국에서 집까지 약 봉투를 품에 안고 달려간 적이 있다. 다만 어린 나는 부모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사랑도 감사의 표현인 양 생각했던 것 같다.
고마워서 사랑한 게 아닌데. 엄마 아빠가 좋아서 사랑했는데. 은혜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응답이었다. 어린 나도 몰랐고, 아마 부모님도 모르셨을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는 살짝 비껴간 감상이겠지만,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저는 공공장소인 카페에 있는데 이렇게 울리시면 반칙입니다.)
그렇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고마워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그랬고, 친구들도 그랬을 것이고, 수많은 어린이들이 그렇다. 우리는 그냥, 엄마 아빠가 좋아서 사랑하는 것이다.
책은 끊임없이 어른들을 반성하게 한다. 어린이를 ‘부모 중 한 명을 닮은 어린 개체’로 납작하게 재단하고, 존중할 줄 모르는 우리 어른들 모두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이른바 민식이 법이 제정되었을 때 나의 가장 가까운 지인마저 “법 제정 후 요즘 애들 영악해서 돈 벌려고 일부러 차에 뛰어든다더라”는 인터넷 발 망언을 입에 담으며 불편을 토로했었다. 그 말이 너무 말 같지도 않아서 오히려 헛웃음이 났다. 정말이지 말이 된다고 보는가?
설령 개 중 정말 영악한 어린이가 일부러 차에 뛰어드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 그렇지 않은 아이들을 못본 체 하고 어른들끼리 규칙을 만드는 것은 옳은 일일까? 그들은 차라는 멋진 탈 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을 뿐이다. 어른이라는 것들이 그따위로 생각해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통제하기 쉬운 아이들에게만 자격을 부여한다. 하지만 ‘착한 아이’라는 것도 다 어른들이 다루기 편한 아이를 말하는 것 아니겠나.
착한 아이들만 있는 세계를 상상해 보라. 아무리 생각해도 떼쓰지 않고, 음식을 편식하거나, 뭔가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며, 공공장소에서 얌전히 앉아만 있는 어린이만 존재하는 세계는 이상하다.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럼 ‘착한 아이’라는 말조차 애초에 이상한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른들의 눈에 씐 이상한 필터를 떼고 정면으로 바라본 어린이라는 세계는 어른들의 생각보다 훨씬 정중하고 현명하고 용감하다.
내 생각이지만, 산타클로스가 진짜 존재한다면 착한 아이를 굳이 걸러내 그들에게만 선물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을 주는 산타클로스는 그냥 현대의 어른들 그 자체이다. 고약한 뚱뚱보 할아범 같으니.
태어나자마자 ‘안녕하십니까, 선생님들.’하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 어른들은 모두 유년시절을 겪으며 자랐다. 실제로 어린이였던 시기를 겪은 어른들이 이 세계를 오해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사실은 좀 바보 같다.
한국 대부분의 식당이 ‘노 2030 존’으로 변했다고 가정해 보자. 가장 분노하는 것은 2030 당사자들일 것이다. 다른 세대가 분노하는 2030에게 손가락질한다.
“식당에서 시비 걸고 아무 데나 침 뱉고 욕이나 하고 노오력도 안 하니까 출입금지 당하지.”
그리고 일부는 침묵한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우리는 시비 걸고 침 뱉고 욕하고 노력하지 않는 2030이 아니라는 것을 자꾸만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식당에 슬그머니 이런 안내 문구가 붙을 것이다.
“착하고 얌전한 2030은 출입해도 괜찮습니다.”
그것을 본 당신의 기분은 어떤가?
특정한 약자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사회는 대체로 다른 약자 또한 혐오하고 차별한다. 생각해 보라. 얌전하지 않은 어린이, 착하지 않은 장애인, 조신하지 못한 여성, 목소리가 큰 노인…. 어린이를 차별하는 우리 사회가 또 얼마나 많은 존재를 묵살해 왔는지. 실제로 얼마 전 ‘노 시니어 존’이 발견되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혐오와 차별은 반드시 사회적 약자를 타깃으로 한다. 사회적 강자만이 규칙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는 그 체제에 편승해 자신의 힘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과시하지만 그것도 새로운 규칙이 생겨 자신이 배제되지 않을 때까지만 가능한 일이다.
꼭 내가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에 사회가 변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변화가 더디기 때문에 자꾸만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 사람들을 설득하게 된다.
우리도 차별당할 수 있기 때문에 어린이들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이가 많든 적든 한 사람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서로를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어린이를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엄마 말을 빌려 한마디 더 보태자면 그렇다.
애들 이겨먹으려는 어른치고 제대로 된 인간 못 봤다.
<어린이라는 세계>는 다정하다. 세상을 나쁜 필터 없이 바라보는 시선은 이렇게 따듯하고 보송보송한데. 내가 혐오와 차별이라는 단어를 쓴 탓에 이 책이 오해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주 따듯하고 말랑한 책이다. 모든 사람이 이럴 수는 없겠지만 이 책을 통해 세계를 다정하게 대하는 법을 새로이 배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