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향
여행 2일차 아침에 오설록 차 뮤지엄에 갔다. 녹차는 보성하고 지리산이 있는 하동이 유명하지만 제주에도 녹차가 나온다는 얘기를 오래전에 들었던 기억이 있다. 여행 일정을 짜기 위해 제주도의 가볼 만한 곳을 찾던 중 기억 저편에 있던 제주 녹차를 재배하는 오설록을 우연히 알게 됐다. 제주도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드넓게 펼쳐진 고즈넉한 녹차밭을 거닐고 녹차 향을 맡으며 투박하면서도 정감이 있는 찻잔 안에 잘 우러난 녹차를 몸 안 가득 흘려보내는 것도 색다른 추억이 될 것 같았다.
마침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 내렸다. 가이드 한 분이 오설록을 간단히 소개 해주는 투어를 마치고 우리는 비를 피해 드넓은 공간이 있는 별관에 자리했다. 별관에는 우리들만 있어서 우리가 건물 전체를 다 임대라도 한 듯 여유롭고 한적한 시간을 보냈다. 너무나도 다양한 종류의 차들이 메뉴판에 적혀있었다. 다들 뭘 골라야 할 지 주저주저하며 골고루 메뉴 하나씩을 선택했다. 나는 오직 제주 그리고 오설록에서만 마실 수 있는 차를 골랐다.
따듯한 물을 가득 담은 대접과 차를 우러내는 조그만 차 주전자 그리고 흙의 질감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찻잔이 하나의 쟁반 위에 같이 차려져 나왔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나를 보며 재경이가 차 내리는 법을 알려 주었다. 재경이는 오래전에 차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그러다 빈속에 차를 자주 마시다 보니 속이 안 좋아져 이후로 차를 즐겨하지 않는다고 했다. 재경이는 차를 거두는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차의 종류, 차를 우러내는 법 등 차에 대한 지식을 우리들에게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우리가 모르는 세월 동안 재경이는 참 많은 것을 하며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차는 세 번까지 우려낼 수 있는데 첫 번째 우려내는 것은 차의 향을 즐기는 것이고 두 번째가 차의 맛이 가장 좋고 세 번째는 차에 대한 마지막 예의로 마시는 것이라고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재경이가 알려 준 대로 해보니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창밖으로 가끔씩 한여름 소나기와 같은 비가 두 세 차례 지나갔고 세차게 지나간 한줄기 비가 꼬리를 남기듯 옅게 드리워진 안개와 유리창에 맺혀 여러 갈래로 흘러내리는 빗방울들은 은은한 녹차의 향기와 함께 그 운치를 더해주었다.
정성껏 한 방울 한 방울 드롭으로 내리는 수제 커피도 있긴 하지만 쉽게 진한 향기와 다양한 맛을 바로 느낄 수 있는 커피와 달리 차는 한 잔의 찻물을 찻잔에 담아내기까지 그 과정이 수고롭다. 대접 가득 담긴 따듯한 물을 차잎이 담긴 차 주전자에 붓고 한참을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다 우러난 찻물을 작은 그릇에 담아내고 다시 마실 만큼 찻잔에 부은 후에야 비로소 차 한잔을 맛볼 수 있다.
한잔의 차를 우러내면서 나는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일들이 참 우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움과 달리 어쩌면 우아함은 시간이 걸리고 정성이 들어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함부로 범접할 수 없고 그래서 우러러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진짜 그렇게 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은퇴를 하고 시간으로부터 여유롭게 되는 날이 온다면 나를 위해 그리고 나를 찾아오는 벗을 위해 한잔의 차를 우러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