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한강 작가처럼 쓰지 못할까

위대한 작가들 틈에서 찾은 나만의 생존법, 에세이 <그 시절의 이름들>

by 소서
글을 잘 쓴다는 건 도대체 뭘까?

한때 나는 이 질문 앞에서 매번 작아졌다. 서점 매대에 누운 내 책을 보면서도, 모니터 속 깜빡이는 커서를 보면서도 늘 의심했다. 내 기준은 저 높은 곳, 구름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박완서 작가의 솔직담백하면서도 진솔한 문체, 양귀자 선생님의 사람을 홀리는 문장력, 최진영 작가의 내면을 파고드는 깊이 있는 시선, 그리고 한강 작가의 시리도록 투명한 고통의 언어들. 그들의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감탄했지만, 책을 덮고 노트북 앞에 앉으면 절망했다. '이런 문장도 못 쓰면서 내가 무슨 작가라고.' 기준이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있으니, 내가 쓰는 글은 고작 동네 뒷산의 흙장난처럼 보였다. 글을 쓸 때마다 막막했고, 때로는 내 문장이 너무 초라해 견딜 수가 없었다. 소위 '내 글 구려병'이었다.


증상은 심각했다. A4 한 장을 채우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결국 백지상태로 노트북을 덮는 날이 허다했다. 위대한 문학 작품과 나를 비교하는 짓은 마치 동네 조기축구 회원이 손흥민 선수의 골 결정력을 보며 "난 왜 저렇게 못 차지?"라고 자책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명백한 과욕이자 오만이었다.


그 지독한 병에서 나를 구해준 건, 역설적이게도 '포기'였다. 위대한 작품을 세상에 내보이겠다는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문장으로 기교를 부려 사람들을 놀라게 하겠다는 목표도 지웠다. 대신 기준을 바닥까지 낮췄다. 아니, 방향을 바꿨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멋진 글을 쓰겠다는 욕심을 버리자.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훼손되지 않게 온전히 전하기만 하자."

글쓰기의 목표를 '작품성'에서 '전달'로 옮기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빠지니 비로소 내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투박할지언정 솔직한 문장들이 나왔다.


그렇게 쓴 글들이 모여 책이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독자분들이 보내온 리뷰에는 내가 그토록 걱정했던 '문장력'에 대한 평가는 없었다. 대신 내가 상상조차 못 했던 말들이 적혀 있었다.


"글과 작가의 삶, 관점이 완전히 하나가 된 것 같아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중, 가장 닮고 싶은 관점을 지닌 작가님입니다." "읽고 나니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요."

독자들은 화려한 문장이 아니라, 내 삶을 대하는 태도와 시선에 반응하고 있었다. 나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솔직하게 적어 내려간 글이 누군가에게는 '인류애 충전'이 되고, '삶을 수놓는 기억'이 되었다는 고백. 내가 전하고자 했던 진심이 그들에게 가닿은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박완서나 한강 작가의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다고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 분들과는 별개로, 나는 나의 진심을 적는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의 기준은 얼마나 멋진 표현을 썼는가가 아니라 독자의 마음에 얼마나 깊이 닿았는가에 있을 테니까.


그러니 오늘도 '내 글 구려병'을 앓고 있는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글은 구리지 않다. 독자는 당신의 기교가 아니라 당신의 '관점'을 읽고 싶어 한다. 욕심을 내려놓고 당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면 된다. 그거면 충분하다.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