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만화부' 친구와 결국 일을 냈습니다

에세이 <그 시절의 이름들> 제작 비하인드

by 소서

글은 에디터인 내가 썼지만, 그 글에 잘 어울리는 이미지를 생생하게 구현하는 일은 오롯이 친구의 몫이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교실은 순식간에 시장통으로 변했다. 매점으로 달려가는 아이들, 교실 뒤쪽에서 말뚝박기를 하는 아이들의 고함 속에서 유독 고요한 섬이 하나 있었다. 바로 교실 중간쯤 위치한 나와 친구의 자리였다.


나는 노트에 깨알 같은 글씨로 무언가를 끄적였고, 옆에 앉은 친구는 말없이 연습장에 그림을 그렸다. 우리는 대화가 많지 않았다. 그저 각자 샤프로 사각거리는 소리만 내면서 할 일에 집중할 뿐. 친구는 당시 유행하던 순정 만화 주인공의 눈망울을 기가 막히게 묘사해내곤 했다. 아이들이 "와, 너 만화가 해도 되겠다"며 몰려들 때면, 친구는 수줍게 웃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교실 구석에서 글을 끄적이던 나는 활자를 다루는 에디터가 되었고, 묵묵히 그림을 그리던 친구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됐다. 그리고 이번에 에세이 <그 시절의 이름들>을 준비하며, 나는 가장 먼저 이 친구를 떠올렸다.


단순히 친분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우리는 친하다. 하지만 일은 일이다. 작가로서의 나는 냉정해야 했다. 이 책에 필요한 삽화가는 누구인가?내 글은 세련된 요즘 감성보다는, 촌스럽지만 따뜻했던 레트로 감성을 담고 있었다. 그 미묘한 무드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몸소 겪어내고 기억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때 그 왁자지껄하던 교실 느낌 알지?"라고 했을 때, 레퍼런스 이미지를 많이 찾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서 눈치 채 곧바로 펜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 그건 나의 20년 지기, 그 '만화부' 친구뿐이었다.


"네가 그려줬으면 좋겠어." 내 조심스러운 제안에 친구는 흔쾌히, 그리고 덤덤하게 수락했다. 물론 걱정이 없진 않았다. 친구 사이가 일로 엮이면 껄끄러워질 수도 있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첫 시안을 받아본 순간, 그 걱정은 눈 녹듯 사라졌다. 내가 문장으로 뭉뚱그려 놓은 흐릿한 기억들이 친구의 손끝에서 선명한 선으로 되살아나 있었다. 글은 에디터인 내가 썼지만, 그 글에 잘 어울리는 이미지를 생생하게 구현하는 일은 오롯이 친구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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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책을 받아 들고 친구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여전히 말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20년 전 교실 구석에서처럼, 서로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 꽤 잘 버텼다. 그리고 결국 해냈네.'


각자의 전공을 살려 완성한 결과물, <그 시절의 이름들>. 이 책은 나의 에세이이기도 하지만, 20년 전 교실 구석에서 꿈을 꾸던 두 여중생의 합작품이기도 하다.


어른이 된 우리는 이제 교실 구석이 아닌 세상 밖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내놓는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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