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그래야만 하는 것
차에 만년필. 어떤 조합 같은가요?
따져보자면 '굳이 그래야 하는' 조합에 속합니다.
차를 마시는 건 아주 간편하진 않죠.
찻잎을 꺼내고 다구를 데우고 다구에 찻잎을 우리고 스트레이너에 차를 거르고 차를 찻잔에 따라야 합니다.
만년필도 크게 다르진 않은데요.
패드나 탭에 글씨를 쓰면 되는 시대에 굳이 카트리지나 컨버터로 잉크를 주입해 사용해야만 합니다.
사실 세척도 간편하지는 않습니다.
만년필 본체에서 만년필 촉 부분을 분리해 물에 집어넣고 잉크를 물에 녹여낸 뒤
세척 용기로 세척을 하고 또 그것을 말리기까지 시간이 더 걸립니다.
하지만 만년필을 써보면 디지털 시대에 굳이 이 번거로운 것을 좇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만년필 특유의 필기감과 사각대는 소리가 참 좋고 만년필에 색을 골라 넣는 즐거움도 알게 됩니다.
미드 나이트 스카이라는 만년필에 월야(月夜)라는 잉크를 넣으면 여름밤에 달밤을 녹여낸 셈이 되겠죠.
차 마시면서 적당한 음악을 틀어두고 향을 사르며 만년필에 넣을 잉크를 골라 주입한 뒤 필사하는 것.
아주 굳이 그래야 하는 번거로운 일임에도 즐겁고 재미있습니다.
흥미롭게도 향도랑 서예도 다도랑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향초나 향수, 만년필도 다들 어느 정도 다도랑 연관이 있다는 말이지요.
개별적으로 도(道)가 될 수도 있고요. 보통은 취미라고들 부르지만요.
굳이 그래야만 하는 것. 그럼에도 즐거운 것. 취미라고 부르는 것.
차에 만년필, 거기에 가끔씩은 향.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