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문정숙 시집 <,사랑이 가슴에 일렁일 때>
도서출판 한강 간행 신국판 120쪽 값 10,000
청자에 비친 고려의 하늘을 생각한다, 이름 없는 도공(陶工)의 손길이 빚은 예술혼의 빛남, 흙을 빚어 외양을 만들고 갖가지 비방을 태운 유약을 발랐다. 가마에 불을 넣고 몇 날을 뜬눈으로 기다렸다. 그의 기원이 이루어질 것인가?
가마에서 막 꺼낸, 아직 불기운이 남아있는 것들이 얼굴을 가린다. 순간, 도공의 망치가 청천벽력으로 후리치고 쨍그렁, 간담을 서늘하게 흔들어 깨운다.
도공의 마음에 덜 찬 청자가 여지없이 버려지는 순간이다. 그렇게 엄격한 선별의 과정을 거쳐 청자는 오늘까지 살아남았다. 맑고 티 없는, 고려 천년의 하늘이 시공을 넘어 빛을 발하는 것이다.
시를 빚는 시인의 마음은 도공의 기원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빚은 자신의 혼을 시집이란 이름으로 펼쳐 보이는 것이다. 서랍이나 파일에서 잠자던 작품을, 기록 편집의 과정을 거쳐 전시하는 것이다.
문정숙 시인의 시집 <사랑이 가슴에 일렁일 때>를 읽으면서 우선 예사롭지 않은 시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섬세하면서 때로 심오하고 따뜻하다는 느낌이 든다. 재미라는 것은 시에서도 놓칠 수없는 수사의 기교로 시의 생기발랄한 생명력을 환기시킨다.
문정숙 시의 특징은 우선 세계의 동일화(identification)로 대상을 의인화하여 소통한다. 동식물에서 사물에 까지 생명력을 불어넣어 시적 화자(서정적 자아)와 내밀한 정감을 나누고자 한다.
또 하나 두드러진 특징은 병치기법을 활용하여 현대시의 세련미를 구사하고 있는 점이다.
비평가 휠라이트(P. Wheelright)는 기존의 은유인 치환은유에 비해 병치은유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 하였다. 치환은유는 유사성에 의한 자리바꿈의 형식 이지만 병치기법은 단순 은유를 넘어 보다 다양하고 풍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
병치은유의 구사는 그만큼 시를 빚어내는 솜씨가 상당한 수준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세계의 동일화, 병치은유의 활용을 통해 시집 전반을 관통하는 ‘따뜻함의 언어미학’이라는 주제구현에 상승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문정숙 시에서 시적 화자의 태도는 어떤 모습일까? 인간이나 자연물을 바라보는 태도는 차별 없이 평등하며 긍정적이고 따뜻하다. 자아의 각성을 통해 대립 원망 갈등을 넘어선 화해와 연민의 정서가 엿보인다.
시적자아가 세계(대상)를 바라보는 태도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 동화(同化)는 세계의 자아화로 시인이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여 인격화 자아화 한다. 그에 비해 투사(投射)는 자아의 세계화이다. 상상에 의해 자아를 세계에 투사하는, 곧 감정이입의 방법이다.
문정숙 시인의 시에서 시적 자아의 태도는 어떤 것인지, 표현상의 두드러진 기법은 어떤 것인지 주목하면서 다음 시를 읽어보자.
<낙타가 묵묵히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고삐를 주인남자 손길에 맡긴 채
험한 산길을 오른다. 강렬한 태양 아래 살아온
역사가
온 몸에서 뚝뚝 떨어진다
낙타는 조금만 가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하면서 뚜벅뚜벅 걸어간다. 낙타를 닮은 남자 앞에
세상 두려움이 동행했을 것이다 그 남자는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낙타처럼 조용히 생을 살아 온 거였다.
생을 곧추세우고 손익계산이 맞지 않는다고
되새김질하는 모습이 참 따뜻하다.>
-<낙타> 전문
공중에서 색깔비늘들이 우수수 혹은 차분하게
네가 앉은 의자 아래로 여운을 남기면서 내려앉는다.
우아한 금붕어처럼 어느 땐 떼로 몰려다닌 송사리 떼로
살갑게 파닥이면서 내려앉는다.
하늘을 향해 파란 아가미로 숨을 내쉬기도 하고
가지지느러미로 관람객을 향하여 여유의 살결 흔들기도 한다
인파의 물결이 마음에 드는 눈치다
등을 맞댄 꽃 물고기
(하략)
-<꽃물고기-벚꽃 아래서> 일부
시 <낙타>와 <꽃물고기>는 세계를 동일화(자아화)하고 병치기법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기법상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앞의 작품 <낙타>에서는 낙타를 인격화 하여 인간(주인)의 행동을 대비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특이한 발상이다. 이 시에서 주체는 낙타이다. 낙타가 주인에게 고삐를 맡긴, 주객의 전도를 통해 낙타의 ‘강인함’ ‘인욕(忍辱)’을 부각시킨다. 주인(가장)은 대비적으로 ‘소심’ ‘위약성’을 가진 연민의 대상이 된다. 세상물정에 영악하지 못한, 가장에 대한 연민을 낙타에 빗대어 우화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앞의 시 <낙타>의 병치기법은 동물과 인간의 병치다. 거기에 ‘두려움‘이라는 관념을 병치시켜 복합구조를 보여준다.
뒤의 시 <꽃물고기>는 꽃잎(자연물)의 낙화를 통해 바라본 서정적 자아의 내밀한 교감과 소통을 보여준다. 우선 섬세하고 감각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원관념인 ‘꽃잎‘이 다양한 보조관념(금붕어, 송사리. 아가미, 가지지느러미)등으로 치환되면서 역동적인 에너지를 충만하게 해준다. ’등을 맞댄 꽃물고기“는 자연(꽃잎)과 인간의 병치를 통해 교감을 시도한다.
“나와 너/ 너와 나/ 서로의 비늘들을 쓰다듬어 주고”에서 시적자아의 따뜻한 정감과 “생의 오류들이 꽃비늘로 피었나니“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연민의 세계관이 드러난다.
시적 화자의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은 무엇인지. 순수와 통속, 이상과 현실이라는 사랑의 양면적 속성을 어떻게 자아화해서 다양하고 풍부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보기로 한다.
<이슬에 몸을 맡긴 청초한 꽃잎 끝에
공작나비 앉아서 사랑의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어요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공작나비의 몫이고
참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것은
나의 책임인 듯해요
그러나 사랑이 쉬운 게 아니지요
(중략)
백합향기처럼 여운이 남도록
꽃가루 뿌려진 길을 걸어 봐요
빨강 사랑이 걸어오고 있어요
사랑은 웃음과 눈물이 뭉실하게 덮여있어요.>
-<사랑이, 가슴에 일렁일 때>일부
이 시는 전반부에서 자연물인 ‘공작나비(남)’와 ‘꽃잎(여)’을 의인화하여 순수사랑의
모델을 제시한다. 이후 인간으로 치환되면서 조건부(책임과 의무)의 통속적 사랑을 병치시킨다. 자연과 인간, 순수와 통속, 이상과 현실이라는 복합의 병치구조다.
사랑의 유형을 신화와 관련하여 구분하기도 한다. 인간은 에로스(Eros, 이성의 사랑)에 의해 태어나고 스토르게(Storge, 부모 자식 간의 사랑)에 의해 양육 받으며, 필리아(Philia, 친구 간의 우정과 사랑)에 의해 다듬어지고 아가페((Agape, 영적 사랑)에 의해 완성된다고 한다. 이성간의 사랑은 필연적으로 이기적인 속성을 전제로 한다. 때문에 요구와 조건의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슬에 몸을 맡긴 ‘청초한 꽃잎‘은 순수를 대변하고 ’빨강 사랑‘은 통속적 사랑의 은유이다. ’달달한’ ‘백합향기’ ‘꽃가루’와 같은 감각적 묘사를 통해 그 이중성의 실체를 드러낸다.
서정적 자아가 현실의 각성을 통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은 ‘웃음’과 ‘눈물‘의 양면성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내어주기만 하는 자연에 비해 인간의 사랑은 이기적이고 불완전한 것이다.
문정숙 시의 자아가 사별한 육친(부모)을 향했을 때, 그리움과 때늦은 후회, 연민의 정서가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화장장에서 당신을 불속으로 들여보내고 한참 후
뼈가 타는 소리를 눈물인 듯 뚝뚝 서럽게 들었습니다
생명이 모질긴 해도 순간의 이별 이었습니다
숲길 따라 가시겠다는 말씀 불꽃으로 활활 타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일 다 곱게 접으시고
고통도 눈물도 없는 편안한 곳으로 안녕히 잘 가세요
어머니 당신은 아주 먼 곳
그 곳으로 행복하게 잘 가셨나요?>
(하략)
<따뜻한 이별> 일부
<가난한 아버지 이른 새벽 헛기침 내뱉으시면서
산비탈 다랑이 밭 젊지 않는 나이에 일구신다.
막걸리 한 잔 힘으로 바윗덩어리 굴리고
힘들게 살아온 생도 굴리고
(중략)
찬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질 때면 아버지가 생각이 납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는 것은 큰 재앙입니다>
-<아버지의 뒤편> 일부
때늦은 후회와 그리움이 묻어나는 사모곡이다. 이승의 강 건너 어딘가에, 고통과 슬픔이 없는 영토가 있을까?
시 <따뜻한 이별>은 '가시밭길‘과 ’꽃길’을 번갈아 헤쳐 온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후회가
담겨있다. ‘뼈가 타는 소리’는 눈물이고 슬픔이지만 ‘순간의 이별’로 받아들인다.
“숲길 따라 가시겠다는 말씀 불꽃으로 훨훨 타고 있습니다”
타오르는 것은 육신 아닌 ‘말씀’ 곧 영혼이다. 소멸의 물질 너머, 불꽃으로 타오르는 정신의
부활을 통해 생의 허무를 극복하는 것이다.
시 <아버지의 뒤편> 역시 육친과의 사별을 통해 사무치는 그리움과 연민의 정이 깊게 베어있다.
“막걸리 한 잔 힘으로 바윗덩어리 굴리고/ 힘들게 살아온 생도 굴리고”는 자연물(바윗덩어리)과 인간(생)의 병치구조로 되어있다.. ‘굴리고’의 유사성을 통해 생동감 있는 묘사로 공감을 얻고 있다. ‘버팀목’이나 ‘바위’는 아버지의 강인함의 은유지만, ‘파리한’ ‘가시밭길’은 고난과 희생을 암시한다.
“아버지의 뒤편이 허공으로 사라진다“에서 생의 무상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는 것은 큰 재앙입니다“에서 죽음의 부정을 통한 삶의 허무를 드러낸다.
두 편 모두 육친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 그 헌신적 삶과 지고(至高)의 사랑에 대한 추모의 정이 담겨있다.
그런가하면 시적자아가 현실의 자각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날씨가 춥고 마음이 우울한 날에는/ 따뜻한 방안에서
이불에 몸을 돌돌 묻고 갇혀 있다가/ 마당이 따뜻해지면
술래가 되겠다고 마당으로 나간다
이적막한 술래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하양깃발 세우고 살아온 생이 여서
마당 끝에서 양손을 허공 향해서 맘껏 벌리고>
(하략)
-<변산 일기> 중에서
<숲이 솔솔 부는 바람의 길을 낸다
어둠의 이파리들을 이쪽저쪽 가르면서 환한 길을 낸다
노인의 슬픈 노래가 휘청 이면서 다녀가고
고독하고 쓸쓸하게 서성이었던 길
편백나무 숲에서 간절하게 빌어본다
한번쯤 가고 싶은 길>
(하략)
- <가고 싶은 길> 중에서
시 <변산 일기>나 <가고 싶은 길>은 시적자아가 되돌아본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각성이다.
전자는 일상의 무료함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의지와 달리 현실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술래’임을 자각한다. 그런 본원적 고독과 마주하는 순간, ‘허공’(구원)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지상((삶)의 숱한 고뇌와 고독까지도 일시에 무화시키는 초극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시 <가고 싶은 길>에서도 ‘고적하고 쓸쓸한’ 자아의 각성과 함께 회상(과거)과 염원(미래)이 대비적으로 제시된다. ‘흔들림’과 ‘어둠’의 회상을 벗어나 자아는 밝음과 안락을 지향한다.
“올려다 본 하늘에는 파란 구름이/ 길 하나를 만들고 있다/ 내가 가고 싶은/ 그길”
‘홍해바다’나 ‘파란 구름’이 만드는 ‘길’은 지향의 세계다. 열려있는 밝음의 세계, 유유자적하는 정신적 자유를 동경한다.
문정숙 시에서 시적자아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는 따뜻하고 포근하다. 그런 온기의 원천은 무엇인가? 또 시에 나타난 색채 이미지는 세상의 온기를 가늠하는 원형적 심상으로 제시된다.
<저 열기는 차츰 북극의 얼음덩이가 되어간다
아무도 가까이 할 수 없는
그 차가움에 옆 열기는 통곡한다
뜨거움과 차가움,/ 사랑과 이별,
어느 하나도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다>
(하략)
-<불꽃에 대하여> 중에서
이 작품에서 ‘뜨거움’(사랑)과 ‘차가움’(이별)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사랑은 생명의 근원이다. 그것은 포용과 너그러움 헌신과 신뢰, 따뜻함의 근원이다. 그런가하면 이별은 불신 갈등 차가움의 근원이다. 이 둘은 ‘선택’이 아닌 운명적 결말의 산물인 갓이다.
‘불꽃’은 열기 정열 사랑을 상징한다.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데워주는 온기의 원천이다.
<그녀가 동백나무위로 찬바람 몰고 오면 따뜻하게
손을 데워서 얼굴을 자근하게 문질러주고
가느다랗고 고은 손가락들을 토닥토닥 만져 봐야지
너른 들판을 밤새 건너 온 사랑하는 이에게
따스한 말도 잊지 말아야지>
-<눈발>전문
시 <눈발>은 백색이미지로 분별을 넘어선 관조의 태도다. 삶의 각성을 통해 대립과 갈등을 넘어선 연민을 표상한다. 비록 ‘찬바람’ 몰고 오는 대상일지라도 ‘데워서’ 문질러주고‘ ’토닥토닥‘ 만져주는 모성의 따뜻함을 베풀 줄 안다. 불과 물, 적과 백이라는 대비적 이미지는 화해와 소통을 통해 완성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문정숙 시의 주요관심사는 대상의 동일화를 통해 사랑과 연민, 삶의 온기라는 ’따뜻함’의 중심 이미지를 언어미학적으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 외 <백목련 피다> <정물화를 그리다> <무당벌레><바람꽃> <소리 없이 오는 것은 슬프다>등 개성 있고 참신한 작품이 많았지만 지면관계로 다 소개하지 못함은 아쉬운 일이다.
문정숙 시인은 우리 현대 서정시가 나아갈 방향을 잘 짚어 가고 있다. 시라는 무대(형식)를 통해 할 말을 하되 개성적인, 자기의 화법으로 해야 한다. 성급하게 무대 위로 직접 올라가는 ‘감정의 과잉‘은 시대착오다. 그보다 ’풍부하고 낯선’ 보여주기의 기법이 바람직하다.
첫 시집 <사랑이 가슴에 일렁일 때> 발간을 통해 한 걸음 더 성숙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면서 축하의 뜻을 전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