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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르바나 Aug 12. 2022

입추-유치환,  역병의 시대와 문화예술의 미래


[이 한편의 시]



입추(立秋)/ 유치환



이제 가을은 머언 콩밭짬에 오다



콩밭 너머 하늘이 한 걸음 물러 푸르르고


푸른 콩닢에 어쩌지 못할 노오란 바람이 일다



쨍이 한 마리 바람에 흘러흘러 지붕 너머로 가고


땅에 그림자 모두 다소곤히 근심에 어리이다



밤이면 슬기론 제비의 하마 치울 꿈자리 내 맘에 스미고


내 마음 이미 모든 것을 잃을 예비 되었노니



가을은 이제 머언 콩밭짬에 오다



출전; <청마시초 1939 >




[시가 있는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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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공간 22. 7월호 원고


詩가 있는 산문 15 / 수선화에게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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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청 (시인 문예비평가)



정호승 시인은 이른바 ‘쉬운 시‘로 독자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시인 중 한명이다. 그 이면에는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전통서정의 빛과 그늘, 그 양면성을 조명해보기로 한다. 왜 쉬운 시에 열광하고 시대를 넘어 아직도 찬사를 보내는 것일까?

정호승 시인이 등단하고 본격 작품 활동을 하던 시점인 80년대는 격동의 시대 였다. 우리사회가 권위주의를 배격하고 민주화와 변화를 지향하는 목소리가 들끓었다. 당시 문단에도 시대적 요구를 수용하기 위한 모색이 다양한 시의 경향성으로 나타났다. 민중적 현실 인식의 시, 사회 변혁운동의 시, 전통해체의 실험 시 군이 다투어 신시(新詩)의 지평을 개척하기 위해 분투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도도한 강물처럼, 흔들림 없이 제 길을 가는 쪽이 있었다. 전통적 감수성의 시를 쓰는 일군의 서정시 그룹이다.


이들은 기존의 전통서정의 고수보다는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인간성회복과 소외계층에 대한 위로와 치유라는 시대적 소명(召命)에 의미를 부여했다.

서정성은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는 대중성에 부합하기 위해 쉬운 시를 선택했다. 쉬운 시의 강점은 우선 독자로부터 쉽게 읽히는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 서정에 뿌리를 두기 때문에 거부반응 없이 받아들이고 공감한다. 그래서 위로와 카타르시스라는 시의 1차적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학의 예술성 측면에서는 도전과 비판이라는 과제를 남겼다.


예시1)

<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예시2)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예시1은 정호승 <이별노래>중 일부이고, 예시2는 김소월 <진달래꽃>(1925) 전문이다. 예시1과 에시2의 공통점은 주제가 ‘이별의 정한’인 점이다. 그리고 시적 화자의 태도가 예시1에서 호소적, 헌신적이라면 예시2에서는 순종적, 헌신적으로 유사하지만 다르다. 두 작품 간의 시차는 어림잡아 50년 이상이지만 그런 시차에 의한 변화를 감지하기는 어렵다. 예시2의 ‘-오리다‘와 같은 극존칭 어미를 제외하고는.


화자의 태도를 보면 예시1에서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의 간청 애원의 근대적사고를 보인 반면 예시2에서 오히려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라 하여 상대의 뜻을 존중하는 현대 자유주의적 사고가 엿보인다. 시대의 역전현상이다.

물론 전통적 서정이 시대를 초월하는 근원성을 지닌다 해도 각 시대를 대변하는 정서적 반응양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오늘의 전통 서정시가 대중의 박수와 찬사를 받는 것으로 사명을 다한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인 것이다.


창밖에 기대어 흰 눈을 바라보며

얼마나 거짓말을 잘 할 수 있었으면

詩로써 거짓말을 다 할 수 있을까.

거짓말을 통하여 진실에 이르는

거짓말의 詩를 쓸 수 있을까.

거짓말의 詩를 읽고 겨울밤에는

그 누가 홀로 울 수 있을까.

-거짓말의 시를 쓰면서(전반부)


이 시는 독백적 진술의 형태로 참회 혹은 성찰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창밖에 기대어 흰 눈을 바라보며”는 작품을 쓰게 된 계기(흰 눈-순수)가 된다.

이전의 시 쓰기에 대한 성찰(거짓의 시)을 토대로 시적 진실과 삶의 진실을 일치시키지 못함에 대한 후회가 드러난다. 시적 진실은 과학적 진실, 삶의 진실과 다르다. 필자가 설정한 가치(색안경)에 부합하는 것은 모두 시적 진실이다.

하지만 색안경을 벗으면 모두 거짓이 되는 절망의 현실 앞에 “거짓말을 통하여 진실에 이르는/ 거짓말의 詩를 쓸 수 있을까.“ 스스로 성찰하는 것이다.


이는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의 참회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이 시의 진술태도 역시 고백적 진술로, 쉽게 쓴 시/ 고난의 현실이 대비되어 더욱 절실하지 못한 자신의 태도에 부끄러움을 고백하고 있다.

정호승 시의 정체성을 가늠해볼 수 있는 다음 작품 한편을 분석해보기로 한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정호승의 시 ‘수선화에게’


*출전; 정호승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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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약력/ 정호승


50년 경남 하동 출생

83년 경희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설굴암에 오르는 영희> 당선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 당선.(73)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 당선.(82)

79년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간행.

시집으로『서울의 예수(82)『새벽 편지』외 간행.

89년 제3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제10회 동서문학상 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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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에 떠는 독자에 건네는 따뜻한 위로

쉬운 시의 함정, 인기보다 문학성이 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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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의 표제시 이면서 원제는 <수선화에게>로 되어있다. 시의 진술은 어떤 익명의 대상에게 주는 편지 혹은 권유형식을 취한다.

“울지 마라”처럼 어조는 외형상 명령 형식이지만 완곡한 권유 충고의 의미가 강하다. 시인 자신의 삶의 경험과 가치관을 바탕에 깔고 있어 다분히 교훈적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라는 말은 시로 쓰기엔 적나라한 것처럼 보인다. ‘수선화에게’의 한 행을 딴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는 이런 이유로 비판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대중적이라는 지적이었다.

실제 그랬다. 대중들은 정호승 씨의 이 시집에 커다란 호응을 보냈다. 난해하지 않고 솔직한 시구들은 독자들의 감성을 건드렸다. 공감이 이어졌다. ‘대중적’이라는 지적이 ‘대중이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됐다.> -신문기사 인용


한 일간지 문화부 기자가 바라본 시 <수선화에게>의 양면성을 지적한 부분이다. “시로 쓰기엔 적나라한 것처럼 보인다,”에서 표현의 진부성 상투성이 갖는 비시적 요소를 지적한다. 그럼에도 독자대중에게 어필하는 것은 외로움의 주체가 다채롭고 따뜻한 위로가 되기 때문이라고 옹호하기도 한다.

시에 열거된 외로움의 주체는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새’ ‘울려 퍼지는 종소리’ ‘마을에 드리워지는 산 그림자‘도 외로움 때문이고, 심지어 ’하느님‘까지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린다고 진술한다. 이쯤 되면 세상은 온통 회색빛 슬픔뿐이다.


이처럼 이 시의 진술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이기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시적 진술은 시인에 부여된 특권이긴 하지만. 시인의 가치관(외로움)이 투영된 모든 대상은 외로운 존재일 뿐, 예외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다분히 강요된 세계관의 주입이란 반발을 불러올 여지가 없지 않다.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이런 격언 같은 싯구에서 감동과 위로를 받는다면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쉬운 시라해서 쉽게 씌어지는 시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쉬운 시로 독자의 사랑을 받는 것만으로 명시라 할수 없는 것처럼. 좋은 시란 평가는 쉽다 어렵다의 문제가 아닌 문학의 예술성과 관련된 것이다. 시는 도전이다. 언어의 일상성, 뻔한 거짓말의 권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모험이다. 낯설음의 시학,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언제나 유효한 깨달음의 화두로 남았다.


<'쉬운 시' 는 눈으로 쉽게 읽히고 가슴에 금방 와 닿는 시가 아닙니다. 시의 내용이 독자에게 쉽게 동의를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려낼수록 깊은 향을 풍기는 차처럼 오래 가슴에 담아두고 되내이면서 새로운 의미를 재생산시키는 시를 많은 시인들은 쓰고 싶어합니다.>

<쉬운 시의 어려움>이란 제목으로 시 창작법을 강의하던 어느 시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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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의 목소리////


[유네스코 뉴스]

커버스토리 | 역병의 시대와 문화예술의 미래




우리 사회의 다른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문화계도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을 이야기하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언제 또 다른 신종 바이러스가 우릴 덮치더라도 더는 이상하지 않은 세상에서, 새로운 위기가 왔을 때 문화계가 또다시 최대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면서도 팬데믹 이전부터 누적돼 온 구조적인 문제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데 점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바이러스, 문화예술을 집어삼키다

문화계가 지난 2년여 간의 팬데믹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받은 분야 중 하나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 간의 접촉을 통해 전파되는 바이러스는 무언가를 새로 상상하고, 그 상상을 구체화해 작품으로 만들고, 다른 사람들을 불러모아 수익을 얻는 문화 산업의 모든 순환 과정을 멈춰세웠다. 당장 없어도 큰일 나는 것은 아니기에 문화계에 내려지는 차단 조치들도 거침이 없었다. 박물관과 콘서트장은 문을 닫았고, 문화유산 해설과 각종 투어 프로그램도 중단됐다. 사람들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그저 뒤로 미뤘다.

그 결과는 수치로 분명하게 나타났다. 영국의 경제분석기관인 「옥스퍼드 이코노믹스」에 따르면 2020년도 세계 경제의 총부가가치(gross value added, GVA)는 전년 대비 3% 감소했는데, 전 세계 문화 산업 분야의 GVA는 전체 평균의 두 배가 넘는 8%가 줄어들었다. 문화산업보다 감소폭이 컸던 분야는 여행 중단으로 가장 극심한 타격을 입은 숙박 및 외식업 분야(-26%)밖에 없었다. 1위와 2위 간의 격차가 커 보이지만, 사업 형태와 특성이 매우 다양한 분야들을 포괄하고 있는 문화계의 특성을 반영하면 그 격차는 확연히 달라진다. 유네스코는 지난 6월에 발간한 『Culture in Times of COVID-19: Resilience, Recovery and Revival』(코로나19 시대의 문화: 탄력, 회복 및 재개)에서 해당 조사 결과를 소개하면서 “문화계의 정확한 팬데믹 피해 상황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지역별·영역별로 세분화해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지적했다. 그러면서 문화 산업에 오디오 및 비디오 스트리밍 사업과 비디오게임 등 팬데믹 시대의 수혜업종으로 꼽히는 산업군들이 다수 포진해 있음을 상기시켰다. 같은 자료에서 이러한 분야를 제외한 뒤 다시 산출한 문화계의 GVA 감소폭은 무려 25%에 달했다.


반복되는 피해의 양극화

유네스코를 비롯한 여러 국제기구들이 팬데믹 이후 발간한 수많은 보고서에서 끊임없이 지적했듯,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전파 경로도, 예방 및 퇴치 과정도, 그 피해 규모도 전례 없이 불평등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는 문화 영역의 피해 조사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됐다. 예를 들어 음악 시장에서 개별 예술인들과 관련 산업 종사자들은 팬데믹 기간 동안 줄어든 수입을 상쇄하기 위해 유튜브나 여타 스트리밍 미디어를 최대한 활용하며 절박하게 움직였지만, 그 과실은 주로 저작권사와 스트리밍 업체에 돌아갔다. 2020년 콘서트 등을 포함한 전 세계 현장 음악 공연 수입은 75%가 줄어든 반면 스트리밍 관련 수입은 18%가 늘어났고 그 추세는 이듬해에도 계속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프랑스의 음악인 협회인 SACEM은 2021년 7월 기준으로 소속 음악인들의 수입이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14.4% 줄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양극화는 영화나 음악 등 공연예술 관련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저작권을 갖고 있는 거대 문화 기업들은 현장 공연이나 상영 대신 온라인 산업에서 수익원을 찾으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버틸 수 있었던 반면, 오랫동안 이들 기업에 새로운 아이디어와 활력과 재능을 불어넣어 왔던 개별 문화예술인들은 일거리와 수입 감소, 혹은 실직을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했다.

팬데믹의 피해는 고통받는 개별 문화산업 종사자들 내에서도 서로 다르게 나타났다. 남성에 비해 여성 종사자가, 전체 종사자 대비 청년 종사자가 상대적으로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다. 2021년 유럽연합이 발간한 보고서 『Towards Gender Equality in the Cultural and Creative Sectors』(문화 및 창의 분야에서의 성평등을 향해)에 따르면, 2020년 한 해 동안 영국 영화산업 내 여성 프리랜서의 숫자는 51%나 줄었지만 남성의 감소폭은 5%에 불과했다. 물론 이는 팬데믹 상황에서 문화계 고용주들이 여성만을 차별적으로 골라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팬데믹 이전부터 고착돼 온 구조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 유네스코도 보고서에서 “(다른 모든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화예술 영역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직책에 더 많이 고용돼 있다”며 세계 전체로 넓혀서 봐도 “전 세계 고용의 39%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이 실업의 54%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팬데믹은 문화계에 축적돼 온 기존의 남녀 간 격차를 더 벌려놓았으며, 이는 표현과 아이디어의 다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화계에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높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문화의 위기는 곧 다양성의 위기

팬데믹은 ‘다양성’을 생명으로 하는 문화계에서 여성 및 소수자의 입지가 얼마나 취약한 상태에 있는지를 드러내 준 동시에, 문화 다양성의 측면에서도 구조적인 격차와 불평등이 적지 않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국가 간 이동을 제한하는 방역 조치의 수준은 앞으로도 한동안 등락을 거듭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더 까다로워진 비자 면제 프로그램이나 취업비자 발급, 감염병 검사 비용이나 격리 기간 부과 등의 조치들은 선진국보다 개발도상국 예술인들에게 더욱 극복하기 어려운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신체적 이동에 대한 제약의 대안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는 디지털 기반 접근법(온라인 오디션 등)은 여전히 전 세계 인구의 37%가 인터넷에 연결돼 있지 않으며 그 대부분이 개발도상국 이하 국가에 몰려 있다는 사실 앞에서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지난 2년간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미의 수많은 다양한 인재들은 단지 자신들의 환경이 팬데믹 시대를 충분히 좇아가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재능을 꽃피울 그 어떤 기회도 얻지 못한 셈이다. 이는 작게 보면 문화적 부가가치의 손실이고 크게 보면 전체 문화다양성의 소실이다. 전(前) 유럽위원회 교육문화 특별고문이자 이탈리아 IULM대 문화경제학 교수인 피에르 루이지 사코(Pier Luigi Sacco)는 “문화적 표현의 자유는 그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게 해 주는 것만으로 보장되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표현을 발전시켜 나갈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라며, “(펜데믹은) 다양성의 위기를 더욱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팬데믹 이후 거대 기업들의 독과점 시장이 되어가고 있는 스트리밍 시장 역시 문화 콘텐츠의 다양성에 중대한 도전 과제를 던지고 있다. 넷플릭스 등의 거대 유통사들 사이에서는 자금력을 바탕으로 콘텐츠 제작사의 제작비를 직접 지원하며 독점적 권리를 취득하려는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으며, 자연스레 콘텐츠 제작 과정에서 유통사들의 입김도 점점 세지고 있다. 또한 이들은 자사 서비스 소비자들에게 구미가 당기는 콘텐츠를 추천하기 위해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그 결과 소비자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에게 익숙하고 유사한 특정 문화의 울타리(cultural bubble) 안에 갇힐 위험성이 커진다.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주류 문화권의 시각과 언어로 만들어진 콘텐츠들이 서로가 서로를 추천하면서 소수 언어나 문화가 반영된 콘텐츠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는 것이다. 반면에 고유의 언어나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각국이 마련해 놓고 있는 보호책, 예컨대 언어 쿼터(language quota)와 같은 제도로는 핵심 서버 시설을 주로 역외에 두고 있는 이들 다국적 거대 기업을 규제하기가 쉽지 않다.

이탈리아 바리(Bari)의 한 극장에서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가 공연되고 있다.

팬데믹 이후 디지털화가 문화계를 휩쓸고 있지만, 그것이 문화계의 어려움을 모두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디지털의 명과 암

여러 한계나 우려에도 불구하고 문화계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디지털화는 팬데믹을 기점으로 그 속도와 규모 측면에서 멈춰 세우기 힘든 정도에 이르렀다. 유네스코는 “문화계의 디지털 전환은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지만 코로나19는 특히 대면 활동이 중요한 문화 영역에서도 디지털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고 분석하며 “디지털 방식의 문화 유통 및 소비는 임계점을 넘어섰고 대면 활동 제약이 완전히 없어진 다음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견해를 소개했다. 일례로 미국 워싱턴DC에서 2021년에 시행된 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62%가 최근 1년 내에 박물관 같은 문화 관련 기관이 제공하는 디지털 콘텐츠를 사용해 보았다고 답했으며, 18세 미만 청소년층에서 그 비율은 82%까지 높아졌다. 응답자의 36%는 해당 콘텐츠에 만족감을 표하면서도 ‘진짜 체험’이 가능해진다면 더는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 답한 반면, 49%는 해당 기관이 다시 문을 열더라도 계속 디지털 콘텐츠를 활용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문제는 이 같은 디지털화가 문화 영역 내의 모든 생산자와 유통 및 소비자들을 이롭게 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해당 기술을 갖고 있는 기업이나 가장 유명한 몇몇 예술가들에게 집중되는 반면에 신인이나 틈새 예술가들의 대면 활동을 대체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그저 ‘온라인’만을 바라보는 것 외에도 소규모 예술단체와 무명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방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또한 AR(증강현실)이나 VR(가상현실) 등의 최신 기술이 머잖아 비대면의 한계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고 해도 직접 보고 듣는 것 자체에 그 예술적 정수가 깃들어 있는 분야, 예컨대 연극이나 행위예술 등의 분야에서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디지털화가 갖는 한계가 명확하다. 레바논 조우칵(Zoukak) 극단의 감독인 오마르 아비 아자르(Omar Abi Azar)는 “연극은 함께 모이는 것이 전부고, 영화가 아니다”라며, 현재 벌어지고 있는 디지털화에 대해 “물이 사라져버린 세상에 남겨진 배관공이 된 기분”이라 말하기도 했다. 싱가포르 디자인 이사회(Design Singapore Council)의 마크 위(Mark Wee) 전무이사도 “디지털 모델을 활용한 일부 기업은 번성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이들은 분명히 고통받고 있다”며 “라이브 공연에 의존해야 하는 업종은 죽었고, 공연예술도 마찬가지”라고 우려를 표했다.

문화계 내의 디지털 격차는 단지 생산자 쪽에서만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도 아니다. 디지털화와 더불어 집에서도 편히 문화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인터넷을 활용할 수 없는 전 세계 37%의 사람들 외에도 디지털 문화 소비에 필요한 장비나 이를 활용할 기술을 갖지 못한 소비자, 그리고 전체 인터넷 콘텐츠의 63%가 영어로 만들어져 있는 현실에서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한 소비자들의 숫자까지 감안하면 디지털화가 ‘모두의 재택 문화생활’을 앞당기리라는 이야기는 전망보다는 희망사항에 가까워 보인다. 이에 유네스코는 디지털 격차가 문화 생산자 및 소비자들 중에서도 특정 그룹, 즉 원주민과 문화적 소수자, 사회적 약자, 장애인, 무명 또는 신인 예술가, 그리고 고령층에서 어떤 결과를 낳고 있는지를 보다 면밀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문화의 회복력을 높이기 위해

바이러스의 확산 속에 막대한 피해와 사업 차질을 감내해야 했던 문화계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지금 여타 어느 분야 못지 않게 빠른 속도로 혁신적인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네스코는 마치 팬데믹 이전부터 존재했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희망만을 기술적 진보에 투영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며 “문화계 전체의 장기적인 생존과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구조적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지금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문화예술 종사자들의 생활 안정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보다 정확한 현황과 데이터 수집 능력을 갖춰 지속가능성에 기반해 문화를 지원하고 ▲인터넷 접근성과 기반시설뿐만 아니라 디지털 문해 및 기술력 향상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영역에서 디지털 격차를 해소해 문화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부처와 영역을 넘나드는 협력과 참여를 통해 통합적인 정책을 마련하고 ▲무엇보다 문화가 보다 지속가능하고 회복 탄력성이 있는 미래를 열어가는 바탕이 되는 ‘공공재’임을 인식시키려는 노력이 우선적인 정책 목표가 돼야 한다고 제안한다.

유네스코가 2020년 4월부터 팬데믹으로 고통받는 예술인 및 창작자를 지원해 문화의 회복력과 탄력성을 되찾기 위해 시작한 리질리아트(ResiliArt)1 운동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문화는 스스로 치유하고 회복하는 능력이 있을뿐만 아니라 그 사회 구성원들이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급격한 산업화와 주류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문화의 무기화, 그리고 오랫동안 쌓여 온 문화계 내부의 불평등과 양극화는 문화의 이러한 능력에 상처를 내 왔고, 갑자기 등장한 바이러스는 ‘사람과 사람 간의 연결’을 전제로 유지되고 발전해 왔던 문화계에 실존적 위기를 안겨주었다. 그 와중에도 음악과 영화, 문학과 텔레비전은 우리 모두가 그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는 데 적잖은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모두가 함께, 문화계가 상처를 치유하고 또 다른 위기에서도 우리 모두의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도록 따뜻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다.

필자/ 김보람 『유네스코뉴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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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네스코 뉴스 794호 (22.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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