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과 함께 자라는 아이
아이와 함께 자라는 어른
바야흐로 독감 예방접종의 시즌이 시작되었다. 아니 사실은 독감 유행 시즌이 이미 시작되었다. 10월이 시작되며 초등학생의 독감 무료 접종이 시작되었는데 뭐가 그리 바쁘고 정신이 없던지, 이 애미는 11월하고도 보름이 지나고서야 달력의 스케줄을 정리하며
‘그래.. 둘째 아이 독감 예방 접종을 해야지. 더 미루면 안되겠어...’
하며 내일은 아침 일찍 병원에 들러 접종을 마친 후 등교를 하도록 해야지 하고 다짐한다.
아침 8시 반에 문을 여는 동네 병원에 빨리 가서 예약을 하기 위해 혼자 자전거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차가운 공기는 벌써 겨울의 향기를 재촉했지만 아침부터 서두른 덕분에 12번째 대기환자라는 타이틀을 따 내고 기세등등하게 자전거를 돌려 집으로 향했다.
10여분을 달려 집 근처 큰 도로를 지나가는데 지나가던 차에서 흘렸던지 비닐에 싸인 커다란 스티로폼이 도로 중앙을 나뒹굴고 있다. 마치 자신이 가을 낙엽이 된 듯이 이리 저리 흩날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가오는 차들은 그 스티로폼을 피하기 위해 예의주시하며 조심스럽게 코너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려 20년 전에 딴 장롱면허로 단 한 번도 운전대를 잡아본 적은 없지만, 더불어 무려 20년간의 조수석 생활로 인해 저런 상황이 얼마나 성가시고도 위험한 상황인지를 직감적으로 느꼈다. 나는 자전거를 자동차라도 되는 듯이 부드럽게 유턴하여 잠시 파킹한 후 사뿐히 자전거에서 내려 스티로폼을 인도 한쪽 구석에 잘 밀어 두었다. 이정도의 각도와 깊이라면 또다시 바람에 날려도 무법자 마냥 도로 위를 나뒹굴지는 않을 것 같았다.
대기환자 12번이면 언제쯤 다시 병원으로 출발해야 하나 다시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리며 집으로 전화를 걸어 아이를 내려오도록 했다. 아이와 오랜만에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아파트 단지에 도착하자마자 자전거는 원래 있던 지하 주차장에 고이 모셔놓고 말이다.
어제 밤 9시가 넘어서까지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피구하느라, 엄마에게 이렇게 늦게 집에 돌아오면 어떻게 하느냐는 타박을 듣느라, 늦은 저녁 식사에 늦은 기상시간까지, 아이는 기가 죽을만 했지만 3층에서 사뿐히 달려내려와 날아오듯 내게 안겼다. 5학년 남자아이지만 둘째라 그런지 더 살갑고 사랑스러운 아이다.
둘이서 도란도란 이야기 하며 걸으며 동네 꽃집에 핀 국화도 구경하고 그 옆에 있는 서점을 지나가며 좀 더 크면 혼자 문제집도 사러 다니고 해야 하니까 위치를 기억해 두라고 일러둔다. 아이는 늘 엄마가 인터넷으로 문제집을 주문해주던 터라
"나 혼자 문제집 사러 서점에 갈 일은 없어."라고 걱정하지 말라며 단정 짓는다.
큰 아이를 키우며 중학생만 되어도 학기별로 문제집을 사는 일은 학기 시작 전 나름 큰 행사인 것을 알기에 나는 속으로만 피식 웃었다. 아직은 귀여운 막내둥이 초등생으로 품에 두고 싶은 내 욕심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독감 주사를 맞고 아이를 학교로 데려다 주는 길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로수를 보며 아이는 ‘은행나무는 사람이 없으면 수정을 못하는 나무여서 인간이 멸종하면 함께 멸종하는 종’이라는 말을 해준다. 나도 처음 듣는 과학지식이라 그러냐며 다소 놀란 표정과 말투로 아이에게 반응을 해준다. 그러는 사이 아침부터 불던 차갑고도 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아파트 단지에 세워둔 여러개의 주황색 주차 금지 삼각뿔 중 하나가 길을 잃고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아이는 이야기를 하다말고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다가가더니 두손으로 조심스레 꽤나 큰 주차금지 삼각뿔을 안고 한쪽에 조심스레 눕혀둔다. 이정도의 센 바람이 다시 불 수도 있다는 것을 예견한 듯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비슷한 일을 해 본적이 있는 듯 자연스럽고 안정적인 반응이었다. 나는 문득 아침에 나에게 있었던 일과 아이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많은 걱정과 고민으로 아이를 키웠지만, 아이가 책임 있는 시민으로 잘 자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학 용어 중에는 ‘모델링’이라는 말이 있다. 아이는 자라면서 자신에게 유의미한 대상의 행동과 말을 자연스레 습득하게 되고 그것이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발현된다는 것이다. 모델링의 대상은 특히 부모와 같은 양육자, 교사, 커서는 친구들이 될 수 있다.
초등교육의 목표는 ‘바람직한 민주 시민 양성’이라고 ‘초등 교육과정 개론서'에는 명시해 두고 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잊고 아이를 키우고 살 때가 많다. 아니 어쩌면 전공자가 아니라면 잘 모르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목표가 유의미한 대상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습득되어지지 않고 그저 하나의 구호로만 여겨질 때 이 목표는 얼마나 공허한가.
어릴 때부터 아이와 교감하고 소통하며 아이에게 바람직한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뒷모습으로 보여줄 수 있는 부모는 아름답다. 그러한 부모는 이미 그 자체로 책임 있는 민주시민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며 자녀에게 자연스레 하나의 모델이자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내가 아이의 손을 잡고 병원을 데리고 가지만 언젠가는 내가 아이의 손에 이끌려 병원을 가는 날도 있을 것이다. 결혼 후 15년의 세월이 이리도 후딱 날아가는 걸 보면 그 시간이 그리 멀 것 같지만은 않다. 아이와 함께 하는 오늘과 내일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그 과정 속에서 아이와 함께 성장하며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