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란 없다
주변 관계를 정리하는 중이다. 아니 계속해서 정리를 해왔고 앞으로도 정리할 것이다. 관계 정리를 하는 나에게 갑자기 왜?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관계에서 갑자기라는 건 없다고 생각해. 관계 정리를 하는 게 취미도 아니고 쉽지 않은 일인데, 이 관계를 놓게 되기까지 그 사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견뎌왔을까.라고 생각해 줘.
20대의 거의 대부분을 함께 하며 많은 곳을 여행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지내온 친구들과의 관계를 이제는 정리하려 한다. 그동안 수많은 사건들과 이야기가 있었지만 글로도 다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우리들 사이에는 많은 추억과 시간들이 있었으니까. 그들도 나를 배려해 주고 참아주는 부분이 있었을 테고 나 또한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이에 배려라는 것이 사라지고 당연한 순간이 찾아왔을 때, 그걸 알아차렸을 무렵 처음에는 화가 났고 그다음에는 서운했고 그다음에는 서러웠으며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었다.
그들에게 내가 항상 먼저일 수 없으며, 각자의 생활이 있음을 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나는 항상 그들이 먼저였고 소중했고 중요했음에도, 그들의 관계와 시간을 존중했으며 집착하지 않았고 기다려왔고 내가 손해 보더라도 좀 더 힘들더라도 참고 배려해 왔다. 그들은 서서히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바라기 시작했으며 나에 대한 배려는 잊어가고 있었다. 집에 무슨 일이 있나? 아니면 요즘 힘든 일이 생겼나? 오히려 걱정하며 1년, 2년, 3년 참고 또 참았지만 그냥 그들에게 나는 그렇게 해도 되는 존재가 돼버린 것이었다.
관계에서 이용당하는 사람은 항상 먼저 배려하고 생각하며 상대적인 약자인 사람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물론 아닌 사람도 많지만 그런 사람도 많다. 상대방의 마음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는, 또다시 필요해지면 찾고 버리고 반복이다. 내가 그들을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쓸데없는 걱정이다. 끝내야 하는 관계라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쉽지 않고 앞으로도 쉽진 않을 것 같다. 화도 나고 짜증 나는 순간들이지만 일단 참자 참자 하면서 버티다가 이젠 정말 끝내야 할까? 이 관계는 잘못된 걸까?라는 생각으로 수백 번 수천번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과정을 반복하다가 결국 정말 상처받고 정말 힘든 사건을 마주했을 때야 아 이 관계는 잘못된 관계구나, 내가 이용당하고 있었구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왜 좀 더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알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이 좋았고 소중했고 나의 전부였으니까.
다른 것에는 그렇게도 단호하고 냉정하면서 왜 사람 관계에서는 이렇게나 물러터진 건지, 나도 이런 내 모습이 싫다. 내가 이런 모습이라 자꾸 이용당하기만 하는 걸까. 퍼주고 내어주는 것도 어쩌면 잘못된 습관일지 모른다. 나도 고쳐야 하는 모습들이겠지. 진짜 잘해주고 위해줄 때 오히려 진짜 그 사람의 본모습이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럴 때 정말 고마워하며 자신의 것도 내어주는 사람과, 아 이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해도 다 이해해 주고 잘해주니까 짜증 내도 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해도 되고 다 괜찮다며 받기만 하는 사람. 수많은 관계를 잇고 끊어내면서 전자의 사람은 정말 소수였다. 나이 들면 왜 인간관계가 좁아진다고 했는지 나 또한 나이가 들면서 점차 깨닫게 되고 있다. 어른들 말 하나도 틀린 것 없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보다. 또 배웠다.
문득문득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고 무엇을 위해 이렇게 잘해주고 그 사람들에게 항상 달려갔는지 모르겠다며 혼자 울곤 한다. 미래의 관계를 그려봤을 때 울고 있는 나를 외면할 그들의 모습이 보여서 이제는 끝을 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