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 쓰고 쇼팽을 꿈꾸는 퇴직자의 하루

이상과 현실 사이... 퇴직하고 발견하는 진짜 내 모습

by 소소

그렇다..... 나는 유능한 사람이었다.

조직 속에서 나는 비교적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고 자평한다. 업무와 관련된 어느 영역이든지 이해가 빠른 편이었고, 응용도 잘했다. 남에게 묻거나 도움을 청하는 일보다는 내가 도움을 주는 쪽이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절대 표현하지 않았지만 - 나는 내가 유능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내 마음속 깊숙이 있었나 보다. 퇴직하고서는 내가 잘하고 관심 있는 것들에 집중적으로 시간을 더 들이고 재능을 발휘할 수 있으니 뭔가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40대 중반에 재미 삼아 유튜브를 시작했다. 영상을 편집하고 올리는 것을 연습하려니 채널이 필요했고, 하나씩 올리다 보니 구독자도 400명 정도가 되었다. 퇴직하면 진정한 유튜버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꿈을 꿨던 순간도 있었다.

브런치스토리에 작가 신청을 해봤다. 뭔가 일기처럼 내 마음을 기록해두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검색하다 보니 브런치 스토리를 알게 되고 퇴직 직전의 극도로 심란했던 일기 몇 편 쓰고 신청했는데, 덜컥 작가 합격 레터를 받고 즐거웠으며, 더더욱 브런치 작가 신청도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고 뿌듯해했던 기억도 난다.

피아노를 배운다. 피아노곡 감상도 좋아하고 피아노 연주는 청소년기 때부터 한 번도 변한 적 없는 버킷리스트자 나의 로망이었다. 국민학교 1-2학년 시절 잠시 배웠다가, 신혼 시절에 다시 도전해서 몇 개월 배웠다가 결국 바쁜 일상에 밀려나버렸다. 퇴직을 생각하면서 바로 피아노를 등록했다. 퇴직 전부터 이게 나에게 맞는 취미인지를, 퇴직 후에도 할 수 있는지 맛이나 보려는 생각이었다. 결국 피아노는 퇴직 후 지금도 열심히 배우는 진행형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퇴직 후의 새로운 꿈을 꾼다.

남편까지 퇴직해서 시간 부자가 되고 나면 미처 가보지 못한 여러 곳을 많이 다닐 거다. 그런 기록들을, 유튜브 영상으로 남기다 보면, 영상편집 기술도 많이 늘 것이고 구독자수도 늘어서 나도 유튜버라고, 크리에이터라고 불리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브런치스토리에 꾸준히 퇴직 이후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소소하게 기록하다 보면 브런치 스토리에서 책도 발행하고 나의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도 늘고, 나아가 실제 종이책도 발간되게 되는 그런 꿈같은 순간이 오지 않을까?

지금은 피아노 수준이 체르니 초반의 실력 정도밖에 안되지만, 꾸준히 연습시간이 쌓이면 교회에서 연주도 하고, 남편과 함께 악기 2중주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곡을 자유자재로 연주할 수 있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다.

아직은 남편을 일하는 중이라, 여행은 남들의 호사스러운 취미일 뿐 나에게는 아직 먼 얘기이고, 일상 소소한 영상 하나를 유튜브에 올리기까지 여전히 편집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며..... 편집 기술은 늘 아직 초보 수준에서 머물며, 퇴직하고 시간만 많아지면 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영상편집이라는 게 고독하고 지루한 단순 작업이다. 콘텐츠도 자신 없고, 편집 기술은 더더욱 자신 없고, 채널은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중이랄까?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정기적으로, 주기적으로 꾸준히 글을 올린다는 것! 정말 브런치 '작가'로서의 역할을 다 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히 성실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다. 꾸준히 글감을 찾기 위해 일상 속에서 영감을 얻고, 기록을 하고, 깨인 영혼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이거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일까?

피아노는 재미있기는 하다. 아직까지는..... 악보가 안 보여 돋보기를 써야 하는 슬픈 상황에서도. 아주 쉽게 편곡된 유명한 곡들을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연주의 즐거움을 알아가고 있다. 그런데 어제도 그제도 나는 계속 뚱땅이는 수준인데 언제쯤 소팽의 녹턴을 아름답게 연주할 수 있게 되냐고... 도대체....


그런데.... 정신차리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조차도 세수도 안 하고, 머리 산발하고, 잠옷 바람으로 식탁에 앉아 쓰고 있는 게 맞는 거니?

오늘 마침 비까지 와서 모든 계획 취소하고 집 안에 드러누울 생각이면서 이런 원대한 꿈을 꾸는 게 맞는 거니?

정신 차리고 세수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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