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선택 - carol 2015
1952년 크리스마스 시즌, 뉴욕의 한 백화점에서 일하고 있던 테레즈의 시선이 복잡한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한 여인에게 머문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여인의 시선 역시 테레즈를 향한다.
서로의 눈빛을 마주한 찰나의 그 순간, 테레즈와 캐롤은 서로에게 빠져든다.
영화 캐롤은 1952년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로맨스 소설 '소금의 값(The Price of Salf)'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1950년대 동성애가 용납되지 않던 시절 사진작가를 꿈꾸던 한 젊은 여성과, 힘겨운 이혼과정을 겪고 있는 중년여성의 사랑을 아름답고 감각적인 영상과 음악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본 지 몇 해가 되었지만, 해마다 겨울이 다가오면 생각나는 영화이기도 하고 또한 나 자신을 믿지 못해 흔들리고 뭔가를 선택하거나 결정하기 조차 두렵고 힘겨울 때 꺼내어 다시 보는 영화이다.
'캐롤' 은 특정 시대의, 다른 빛깔의 사랑이야기를 넘어, 결국 자신이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용기에 대한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 어디선가 갑자기 날아든 사람 같아요. "
캐럴의 표현대로, 한순간의 갑작스러운 사고와 같이 그 겨울 테레즈는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그리고 테레즈는 함께하는 시간마다 그녀의 모든 순간을 눈에 담고, 또다시 카메라 렌즈에 담는다.
영화에서 대사는 최대한 절제되었고, 그 대신 배우들의 눈빛과 작은 몸짓 그리고 표정으로 소용돌이치는 그녀들의 감정을 극도로 보여준다.
"그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 거야 "
테레즈의 말대로, 테레즈가 사랑한 사람은 여자 캐롤이 아닌 그저 캐롤이라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완벽해 보이지만 흔들렸던 캐롤 보다 오히려 더 솔직한 감정을 보여준다.
테레즈와의 관계가 폭로되며 양육권 문제에서 불리해 지자 둘은 헤어지게 되고, 테레즈는 보고 싶은 마음에 용기를 내어 캐롤에게 전화를 건다. 테레즈의 목소리를 듣고 숨죽여 눈물 흘리며 전화를 끊어버린 캐롤, 그리고 테레즈는 대답 없는 수화기 너머로 속삭인다.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만 했던 캐롤 역시 뒤늦게 더 이상 자신을 부인하며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1950년대 미국사회, 그리고 이혼으로 인한 양육권 다툼. 감내해야 할 것들이 많은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테레즈에 대한 사랑은 캐롤이 결국 솔직한 자신의 모습으로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있는 힘이 되었다.
한동안의 헤어짐 후 캐롤의 연락으로 다시 만나게 된 두 사람. 호텔라운지에 마주 앉아 캐롤은 조심스럽게 자신에 대한 얘기를 전한다. 가구회사에서 바이어로 일하게 되었고, 시내에 아파트도 구했는데 둘이 살기에도 충분한 공간이라고.. 그래서 같이 살고 싶다고..
하지만 테레즈는 거절하고, 캐롤은 이 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약속이 있으니, 혹시 마음이 바뀌면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랑해' 라는 말과 함께 테레즈의 어깨에 잠시 손을 올리고 떠난다.
영화 마지막.
손님으로 꽉 찬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선 테레즈의 시선이 불안하게 움직이다가 멈춘다.
거기에 그녀, 캐롤이 있다.
잠시 시선이 머물고, 영화 전반에 흐르던 카터버웰의 스코어 '오프닝'이 보다 강렬해지며 테레즈의 심장소리를 대신한다.
그리고 일행들과 대화를 나누는 캐롤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지며, 테레즈가 그녀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녀를 향해 가는 동안 한 무리의 신사들이 테레즈의 앞을 가로질러 걸어가며 캐롤의 모습이 잠시 가려진다.
그리고 다시 남녀 커플이 지나가며 캐롤을 향해 걸어가는 테레즈를 가로막는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장벽이 걷히고 다시 캐롤이 보인다.
서서히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던 캐롤의 눈빛이 고정된다.
안간힘을 쓰며 감정을 부여잡고 그곳을 바라보는 캐롤의 눈빛과 작지만 확신에 찬 미소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 겨울,
캐롤과 테레즈의 선택은 사랑의 선택일 수도 있지만 삶의 선택이기도 하다.
식사 메뉴조차 결정하기 힘들어했던 테레즈와, 자신의 모든 삶이 송두리째 바뀔 수도 있었던 캐롤의 선택의 힘은 서로의 믿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을 가로막은 사람들이 하나 둘 화면 속에서 사라진 것처럼
장애물은 사라지고 그들의 선택은 보다 뚜렷해진다.
정답을 찾기 어려운 삶의 여러 순간순간, 매사에 나 스스로를 믿지 못해 움츠려 드는 지금,
나는 캐롤과 테레즈를 생각한다.
그녀들의 용기와 선택을 응원하며, 나 스스로에게도 힘을 보탠다.
그 겨울, 그녀들이 서로에게 다가갔던 것처럼, 나도 나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사진출처 : 영화 <캐롤> 공식 스틸컷(배급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