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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 Mar 02. 2023

[가정폭력 일기1] 나는 나를 피해자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날 엄마는 고래처럼 울었다.

고래의 울음소리가 깊은 바다를 진동시키듯, 그 깊고 굵직한 울부짖음은 나를 울렸다. 

그래서 나는 새끼고래가 된 듯 엄마 등에 매달려 자주 울었다. 

엄마의 몸에 난 멍자국을 바라보며. 


[가정폭력 일기1] 나는 나를 피해자로 인정하기로 했다


상담사가 내게 물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였어요?"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어렸을 때요. 그러니까..."

그때 내 머릿속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어느 순간이 떠올랐다.


여느 때처럼 아빠는 술에 취해 엄마를 때렸고, 엄마는 그런 아빠에게 욕을 하고 물건을 집어던졌다. 나는 방에서 떨고 있었다. 문고리를 쥐고 숨죽이면서. 그런데 한참을 싸우던 도중 안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에서 조금 더 나아간, 울부짖음이었다. 


이상했다.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나는 안방으로 갔다. 엄마는 숨이 막힌다는 듯 자기 가슴을 세게 치고 있었다. 엄마의 표정과 몸짓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입에서 짐승 같은 울부짖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빠는 네게 '네 엄마가 이상하다'며, 구급차를 불러야 할지 물었다. 


난 왜 하필 '이 순간'을 떠올렸던 걸까? 아빠에게 맞아 엄마가 입원했을 때도, 잠옷 바람으로 쫓겨나 모텔에 갔을 때도, 경찰 아저씨가 찾아와 아빠를 말렸을 때도 아니고.


담담하게 대답하고 싶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어요, 하고 이야기를 하던 내 눈엔 눈물이 가득 고였고, 끝내 엉엉 아이처럼 울었다.


상담사는 내게 다시 물었다. 무엇이 가장 힘들었느냐고.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엄마가 잘못될까 봐 너무 무서웠다고. 


그리고 연이어 내 입에서 나온 말에, 나도 놀랐다.


"엄마한테 미안해요. 아빠가 술 취해서 오는 날이면 저랑 동생을 꼭 혼냈거든요. 근데 엄마랑 싸우면, 아빠가 저희는 가만히 놔두니까요, 내심 엄마가 아빠랑 싸워주길 바랐던 것 같아요."


내 안에 응어리진 죄책감을 처음 깨달은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내 안엔 오로지 '아빠는 밉고, 엄마는 불쌍하다'는 두 가지 생각밖에 없는 줄 알았다. 깊이 숨겨둔 나의 감정을 비로소 찬찬히 뜯어보게 되었다. 


그 안엔 나도 모르는 생각과 감정들이 잔뜩 엉키고 얽혀 있었다. 사실 엄마가 밉고 아빠가 불쌍할 때도 많았다는 것, 엄마와 동생을 지키지 못한 스스로를 단죄하고 미워했던 것.... 난 괜찮아, 하며 덮어두었던 감정과 생각들은 그대로 곪아 지금의 나를 잔뜩 옥죄고 있었다.


언젠가 대학교 심리학 수업을 들을 때, 가정폭력 가정의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그때 놀랐던 건, 피해자들의 특징이 고스란히 나에게도 있다는 거였다. 한번도 나를 '피해자'라고, 생각해본 적도, 불러본 적도 없기에 충격을 받았다. 


내 머릿속 폭력의 피해자는 우리 엄마밖에 없었으니까.


두들겨 맞았던 엄마에 비하면 나는, 한번도 물리적으로 맞은 적이 없었다. 남자란 이유로 몽둥이로 매질당한 동생에 비하면 나는, 여자란 이유로 혼나지 않았고 오히려 예쁨 받은 적이 많았다. 


술 취하지 않은 아빠는 누구보다 다정했고, 내게 사랑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피해자일 수 없었다. 아니, 피해자여선 안 됐다.


그런데 심리학 교재에 나와 있는 피해자들의 징후는, 이미 내 일상에 모조리 들어와 있었다.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고, 사람이 두렵고, 항상 불안하고 긴장되어 있는 나의 일상.


엄마가 서울에 올라온 날, 좁은 자취방에서 엄마와 나는 서로의 살을 맞대고 누워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처음으로 털어놨다. 


엄마 그땐 미안했다고. 엄마가 나 대신 아빠에게 맞아주길, 잠시 생각했었다고. 엄마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엄만, 네 잘못이 아니라며 오히려 내게 사과했다.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서로 미안하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기나긴 밤을 버텼다.


어쩐지 울고 나니 앓던 이가 빠진 듯 시원해졌다. 


나는 나를 피해자로 인정하기로 했다. 


내게 아직 상처가 남아 있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야 치료받을 수 있으니까. 



이 글은 나의 앓던 이가 빠지고, 구멍 난 그곳을 찾아 치료하고, 새살이 돋기까지의 과정이다. 나를 피해자로 인정하고, 내 상처를 인정하고 난 후 내 삶은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바뀌어갔다.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은 누군가가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어깨를 두드려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도 피해자였노라고,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뎌온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이 글이 당신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시원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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