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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담다 May 24. 2024

직장을 그만두다.

공방을 열기로 했다.

또 깼다.


일주일째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이 떠올라 잠을 설쳤다. 갑자기 든 생각은 아니다.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다독이며 빠르게 머릿속에서 몰아냈을 뿐이다. 이번에는 쉽게 물러가지 않는다. 지금이 아니면 시작도 해보지 못할 ‘꿈’과 함께.


9시 출근, 6시 퇴근.

대학을 졸업하고 15년간, 이직을 할 때 생기는 잠깐의 시간 빼고는 ‘일이 곧 나’라고 증명을 하듯이 일에 미쳐 살았다. 그러다 부모님과 어딘가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터진 눈물과 함께 ‘사는 게 지겹다’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사는 게 싫다고. 누가 하라고 시키지 않았는데, 등 떠밀린 사람처럼 서러워했다. 이게 시작이었다. 한번 쏟아져 나온 이 감정은 3년에 한 번, 2년에 한 번, 1년에 한 번…. 그러다가 이제는 수시로 찾아와서 잠을 설치게 했다.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다. 혈압이 높다. 혈압이 높은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했다. 결과를 보지 않더라도 알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부어있었고, 잠을 설칠 때도 많았다. 특히 생리불순이었다. 6개월에 한 번 생리를 했고, 과다 출혈로 생리 기간이 10일 이상이었다. 그래서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공방을 차릴 돈이 준비되지 않았고, 특히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그만둬야겠다는 결심을 계속 뒤로 미루게 했다.


당시에 일하는 직장은 바로 그만두었지만, 창업지원을 하는 다른 단체에 바로 입사했다. 4,000만 원을 대출해 주고 창업 전 과정을 지원해 주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2년 동안 창업지원을 해주면서 내 공방 운영에 대한 틀을 조금씩 구상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의류학과를 나온 두 명의 지인과 작은 공간을 얻어 작업실로 사용하면서 공방에 필요한 자격증을 취득했다.


지금의 일이 된 미싱을 배우기 시작한 건 시민단체로 이직하면서다. 대학교 4년 내내 아르바이트하면서 번 돈으로 퀼트, 쉐도우박스, 포크아트, 테디베어 등을 배웠고, 시민단체에서 일하기 전에도 취미로 만들기를 계속했다. 클라이언트들의 교육을 맡길 강사를 섭외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미싱 공방에서 5년 동안 수업을 들었다. 공방을 운영하는 데 자격증이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출강을 나갈 때 받게 되는 수업료의 증빙자료가 되기도 하고, 나와 같은 공방을 창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자격증을 발급해 주기 위해서는 자격을 갖춰야 했다.


드디어,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만두기 전부터 생활정보지, 포털에 올라와 있는 주택 매물을 살펴보았다. 주택에 공방을 차리고 싶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살았던 주택은 나에게 가장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상가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자금으로 살 수 있는 주택을 거의 모두 보러 다녔다. 약 6개월간 모든 주택 매물을 찾아보았다.

      

사도에 위치했거나 인테리어 비용이 많이 나올 것 같은 주택을 제외하다 보니 공방을 운영할 만한 곳을 찾기 어려웠다. 수첩에 적힌 마지막 집으로 갔다. ‘여기도 안되면 어쩌지?’라고 생각하며 방문했다. 건물 외관과 내부의 구조도, 무엇보다 내부에 있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높이나 넓이가 딱 좋았다. 부동산에서 생활정보지에 낸 지 하루 만에 방문한 집이었다. 지금의 공방이다.

    

지금의 공방을 처음 봤을 때, 마음은 이미 공방 운영 중이었다. 흥분한 상태에서 부모님에게 집에 관해서 설명했다. 딸의 꿈이 공방 운영이라는 건 알고 계셨지만, 조금은 당황하셨다.

“우선 OO(동생)랑 같이 가보고, 주말에 오빠 오라고 해서 가보자.”

바로 다음 날 동생과 함께 주택을 보러 갔다.

“30년 정도 된 주택치고 건물 컨디션이 좋은 편이에요.”

동생의 말에 안심이 됐다.

남은 관문 하나, 오빠다.

오빠가 올 때까지 3일의 시간이 남았다.

부동산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지 않겠다고 했다.

주택을 본 오빠는 위치도, 상태도 괜찮은 것 같다고 했다.

오빠가 말한 위치는 공방으로서의 위치가 아니었다. 매매할 주택에 대한 재산적 가치였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나를 대신한 금전적 가치에 대한 말이 오갔다. 공방 운영이 잘 안돼서 망하더라도 손해 보지 않을 금전적 가치.  


“그런데, 이거 해서 먹고살 수 있겠냐?”

“1층에 카페를 같이 하면 어떻겠냐?”

"요즘 주택 카페가 유행이니 그냥 카페를 하면 어떻겠냐?"

"골목 안에 있어서 눈에 띄지 않는데, 사람이 오겠냐?"

등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공방으로 생계를 이어가겠다고 하자, 그동안은 '공방하겠다'는 말이 지나가는 이야기인 줄 알았던 가족이 우려의 말을 쏟아놓았다.


창업지원을 하는 간사로서 사업 타당도를 심사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 과정에서 예비 창업자들이 낸 보고서를 보면서 고정지출, 재료비, 월매출, 순수익 등을 따지는 예산서를 내가 창업하고자 했던 미싱 공방에 대입해서 작성해 본 적이 있다.


그 결과, 월세가 가장 큰 부담이었다. 월세만 아니라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혼자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주택을 구입하기로 한 이유다. 예산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재료 사입은 식품이 아니기 때문에 상해서 버리는 손해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재고로 남는 원단은 원데이클래스나 제품 제작으로 판매를 하면 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사람들이 공방에 오게 하려면 좋은 도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뒤따랐다. 공방과 카페를 함께 운영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창업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바리스타 자격증도 취득했었다.   


공방과 카페를 함께 운영하는 곳, 핸드메이드 제품을 판매하는 카페를 몇 곳 방문했다. 잘 운영되는 곳도 있었지만, 정체성이 모호했다. 커피의 맛이 카페를 전문으로 운영하는 곳에 미치지 못한 곳도 있었고, 카페의 분위기와 알록달록한 핸드메이드 제품이 어울리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1, 2층으로 나뉘어 카페와 공방이 모두 잘 운영되는 곳도 있었다. 대표와의 인터뷰 결과, 공방 운영이 꿈이었는데 공방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익이 더 나는 카페에 많은 힘을 쓰고 있어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민 끝에 공방만 운영하기로 했다.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 주택 위치가 가진 상권의 한계는 SNS 홍보로 해결하기로 했다. 운영하고 싶었던 공방의 모습은 한 타임에 3, 4명 정도 수업할 수 있는 규모였다. 많은 사람이 한 번에 온다고 해도 혼자 커버할 수 없었다. 정말 미싱을 배우고 싶고, 만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조용한 공간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했다.


지금도 '우선 노출' 광고 하라는 마케팅 전화를 받는다. 그때마다 하는 답변이 있다.

"공방은 많은 사람을 수업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저는 제 속도로 운영하겠습니다."

설득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지만 "죄송하다."라고 하고 전화를 끊는다.


왜 나라고 많은 돈을 벌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원하는 정도의 바쁨과 휴식을 취할 수 있고, 풍족하지는 않지만 먹고 싶고 사고 싶은 걸 살 수 있는 정도면 됐기 때문에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았다.


건물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부모님 허락이 바로 떨어진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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