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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선영 Dec 19. 2018

오래된 새로움, 지역 커뮤니티

80년대생 도시사람에게 낯선 그 이름, 지역 커뮤니티 (마을공동체)

나는 80년대생이다.
지역커뮤니티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계속 살았다. 지역커뮤니티, 또는 마을공동체라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런 비슷한 것을 4-5살 때 동네에서 간접적으로 보았던 것 같긴 한데,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사라졌다. 그것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이미지는 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을 통해 화면과 글로 배운 것들이다.


특히 최근 방영한 '응답하라 1988(응팔)'은 쌍문동 골목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마을공동체를 보여주었다. 1988년 고등학생이었던 주인공들의 가족과 동네 사람들이 각자 살기 힘들지만 서로 도우며 정겹게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에게 동네에 대한 하나의 모델, 연대의 좋은 점 등을 보여주었다. 그 시절을 지냈던 사람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나에게 그리고 나보다 어린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오래된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농촌문화에서 도시문화로 넘어가는 과도기, 응답하라 1988


응팔의 등장인물들은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었다. 빠르게 근대화, 도시화되는 한국사회에서 농촌의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주했고, 소작농에서 노동자가 되었다. 농촌마을의 공동체 문화 속에서 살아온 그들은 도시에서도 앞집, 옆집 등 이웃과 함께 농촌의 그것과 비슷한 공동체를 만들었다.


농촌에서는 같은 마을에서 비슷한 경제적 수준으로, 비슷한 일을 했다. 계절에 따라 농사일이 바쁜 시기가 되면 서로 노동력을 교환했다. 내 밭의 일을 옆집 사람이 함께 해주면, 나도 옆집 사람의 밭일을 해주러 가는 식이었다. 시장경제가 활발하지 않은, 자급자족의 농촌마을에서는 마을 내에서 함께 해결해야 하는 자원들이 많았다. 같이 결정하고 같이 해결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농촌에서는 이런 '상부상조의 거래 관계', '직접 결정에 참여하는 일'이 있었다. 농촌에서 이웃과의 '노동력' 교환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연대할 수 있었다. 아니, 연대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웃의 노동력을 얻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마음에 조금 들지 않는 것이 있어도 참았고, 싸우더라도 화해했다. 좁은 동네에서 살다 보면 매일 얼굴을 마주 봐야 했기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응팔의 부모세대들은 함께 하는 농사일은 없지만, 농촌의 공동체에서처럼 이웃과 관계를 맺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농촌의 공동체 문화는 도시에서 이웃과 관계 맺는 하나의 문화적 양식으로 유효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서로 다른 직업을 갖고 있으며, 금전거래를 통해 대부분의 생활자원들이 해결되기 때문에, 농촌처럼 서로 함께 노동력을 나누는 '상부상조의 거래 관계'가 생기기 어렵다. 또한 국가 시스템으로 일상의 대소사가 해결되었다. 이웃과는 관계 맺을 '일'이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보면 되었다. 굳이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직장에서도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데, 동네에 까지 와서 감정노동을 할 필요는 없었다. 도시는 익명의 개인주의 사회였다. 근대 도시 공간과 사회는 그것을 더욱 촉진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져 갔다.  


1988년 즈음을 기점으로 도시에 남아있던 농촌 공동체 문화가 힘을 잃고 익명의 개인들이 이루어내는 사회가 되기 시작했다. 새롭게 주류가 된 세대는 과거의 공동체 문화를 기억하고는 있지만, 도시의 개인주의가 주는 자유를 만끽했다. 폐쇄적인 마을문화보다 자유로운 도시문화를 마음에 들어했다. 그리고 도시사회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사회로 점점 나아갔다.





나는 80년대 도시에서 태어났다. 지역커뮤니티를 모른다.


나는 도시에 남아있는 농촌 문화가 사라질 즈음 태어났다. 산골짜기 고흥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란 아빠, 역시나 산골짜기 이리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란 엄마는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서울 성수동에서 태어나, 2살부터 성산동에서 살았다. 1988년 당시 나는 미취학 아동이었다. 내가 살던 빌라에는 응팔의 쌍문동 골목 같은 끈끈한 공동체는 없었다. 아랫집, 옆집에도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살아서, 골목에서 같이 놀았던 기억이 있고, 그 집의 엄마들과 우리 엄마가 같이 김장을 하고 간식을 서로 나눠먹던 기억은 난다. 하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아랫집, 옆집은 이사를 갔다. 전세로 들어와 있던 아랫집 가족들은 광명시에 새로 생긴 아파트를 분양받아 떠났다. 옆집도 아마 비슷했던 것 같다. 평상이 놓여 있던 빌라 마당은 각 세대당 자가용 1대씩 갖게 되면서 자동차로 점령되었다. 그 후로는 우리와 비슷한 나이 때의 가족이 이사오지 않았다. 우리 부모님들도 예전만큼 이웃들과 교류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 빌라에서 사는 동안, 옆집, 윗집, 아랫집은 자주 바뀌곤 했다.


중학생 때부터 마을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래도 초등학교 다닐 때는 행동반경이 동네에 한정되어 아는 사람을 마주칠 수도 었었지만, 마을버스를 타고 홍대로 나가게 되면 그 확률은 현저히 떨어진다. 나는 아무도 나를 모르는 지역, 익명의 지역을 중학생 때부터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내가 경험해오고, 지금도 관계 맺고 있는 커뮤니티는 학교나 회사라는 '기관/조직'을 통해 알게 된 친구들이나 '취미생활'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이다. '지역'과의 관계성을 찾아보자면, 다들 거주지는 제각각이지만 주로 모이는 장소가 있고 그 장소에 대한 공통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좋아서' 그 장소에 가는 것이지만, 우리들이 그 장소에 대해 어떤 계획이나 결정을 내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아마 도시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커뮤니티들만 경험해봤을 것이다.


과연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도시에서의 지역 커뮤니티'는 무엇인가?





지역 커뮤니티,

시민들의 해방적 정치기구인가, 정부의 새로운 통치기구인가


2000년대 초반부터 서울시와 정부 정책에 있어서 '지역커뮤니티'가 중요하게 부상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직접 동네 문제를 해결하고 가꾸어 나가는 '마을만들기' 사업이 활발해졌다. 사업의 주체로 주민들이 호명되었고, '마을공동체, 주민커뮤니티, 주민협의체'라는 조직의 모습으로 구체화되었다.


마을공동체(지역커뮤니티)의 역할, 기능은 다음과 같다.

- 내가 사는 동네의 문제를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해결한다.

- 내 이익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한다. 공동체의 이익이 장기적으로 볼 때 내 이익이다.


'지역커뮤니티' 중심의 마을만들기, '지역커뮤니티' 중심의 사회적 경제 등은 한국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된 모델이었다.

근대 사회는 익명의 개인들이 점점 더 소외되고 단절되는 방향으로 도시공간과 통치 시스템을 만들어 갔다. 아픈 이웃 돌보기, 거리를 감시하기, 동네 문제 함께 해결하기, 집 앞 거리 청소 등 지역 주민들의 연대와 공유의 영역이었던 일들을 국가 시스템으로 흡수하였다. 복지, 치안, 환경개선 등의 분야별 정책사업이 되어, 국민들, 각 개인들의 삶을 국가가 관리하게 되었다. 국민들도 국가의 보살핌 하에서 자유와 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편안함도 잠시. 국가는 국민의 편이 아니었다. 영국, 미국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1990년대 후반 한국사회에도 찾아왔다. 노동 시장의 유연화(ex. 쉬운 해고), 작은 정부, 자유시장경제의 중시, 규제 완화 등의 형태로 구현되었다. 지역커뮤니티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해방적 정치(박주형, 2012)로서 태동되었고 부상하게 되었다.


반면 정부 입장에서는 지역커뮤니티를 조금 다르게 바라본 것 같다. 정부는 저성장 시대, 인구절벽, 고령화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 세수가 급격히 줄어들 미래에는 지금보다 예산을 훨씬 줄여야 한다. 정부는 '지역커뮤니티를 통한 통치'를 작동시키려 하는 듯하다.(박주형, 2013) 정부가 해오던 복지나 치안, 환경 정화 활동 등을 다시 주민 연대의 영역으로 내려보내려 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스스로 그러한 활동을 하기를 원하고, 정부도 건네주고 싶을 때, 서로의 니즈가 맞으면 정말 좋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시민들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부가 억지로 급하게 내려보내려 하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정부의 유도와 촉진에 의해서 시민들이 떠맡게 되면, 그 지역커뮤니티는 '해방적 정치 기구'라기보다는, 정부의 '통치 기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박주형, 2013)


시민들의 '해방적 정치 기구'와 정부의 '통치 기구', 이 둘은 정말이지 다르다. 겉으로 보기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참여자의 내면, 그리고 지속성 여부에서 큰 차이가 난다.


전자의 경우, 참여자와 지역커뮤니티는 자발적인 의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할 가능성이 높고, 커뮤니티 활동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후자의 경우, '시켜서', '명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되어 행복할 가능성은 낮아지고, 외재적 지원이 끊기면 지속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정부는 마을공동체 사업, 도시재생 사업의 주체로서 지역커뮤니티를  '육성'하기 위해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준비되지 않은 시민들을 '지역커뮤니티를 통한 통치 체계'로 포섭하기 위해서는 '지역커뮤니티에 대한 포장'이 필요했고, 70-80년대 농촌경험을 갖고 도시로 상경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정겨운 이미지(응팔의 골목 공동체 이미지)를 활용하는 듯 하다.


하지만 포장된 그 이미지는 현대 도시의 상황과 맞지 않는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농촌 공동체 경험이 없는 세대에게는 그저 어색할 뿐이다.






정부가 지역 커뮤니티를 통치 기구로서 이용하려고 할 지라도, 그 덕분에 시민들이 자발적인 커뮤니티 활동하기 좋은 제도적, 행정적 여건이 만들어지게 된다면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윈윈 하는 상황이 될 수 있으니. 그러나, 지역커뮤니티 활동에 대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나 활동이 여전히 저조한 것이 사실이다. 정부의 엄청난 예산 지원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문제인가?

왜 사람들이 지역커뮤니티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가?


나는 우선 도시의 지역커뮤니티가 정겨운 이미지로 소모되는 것이 아닌, 시민들의 합리적 선택에 의한 결과로 재정의 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다음, 지역 커뮤니티의 사회적 의의(해방적 정치, 풀뿌리 민주주의 등)뿐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의 효용에 대해서도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 : 박주형, <도구화되는 공동체: 서울시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에 대한 비판적 고찰>, 공간과사회,  제23권 1호(통권 43호), 2013년,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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