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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선영 Dec 14. 2018

혼자 있고 싶을 땐, 걸었다

가장 사적인 순간은 가장 공적인 공간에서 가능했다. 

나는 성산동에 위치한 빌라에서 2살부터 30년을 넘게 살았었다. 청기와 지붕에 청기와 담장이 둘러져 있었다. 한 세대 당 방 세 개, 거실과 부엌, 화장실, 다용도실, 베란다로 구성된 80년대 신식 빌라였다. 이름도 무려 '서울'빌라였다. 


아마도 4인 가족이 살기에 적당했을 이 집에서 부모님과 우리 세 자매, 할머니까지 총 6명인 우리 가족이 살았다. 언니와 동생, 나는 한 방에서 지냈다. 책상 2개와 옷장이 들어가고도 잠잘 곳이 남아 있을 정도로 비교적 넓은 편이었다. 어릴 때 나는 겁이 많아서 언니, 동생과 함께 자는 것이 무섭지 않아 좋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혼자 있는 걸 좋아했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집안에서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가끔은 숨 막히고 답답했다. 그럴 때면 예민해지곤 했었다. 좀 떨어져 있고 싶었다. 학교에 가는 평일에는 괜찮았지만, 어디에도 가지 않는 주말에는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만들어야 했다. 누군가의 간섭도 없이 조용하게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이른 아침'이었다. 원래 아침잠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주말이어도 늦잠 자는 법이 없이 7시면 눈이 떠졌다. 그리고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조용한 부엌 의자에 혼자 앉아있는 게 좋았다. 그러다가 누군가 일어날 시간이 되면 나는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이른 아침에 시작한 혼자의 시간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온전히 더 즐기고 싶었다. 



동네 거리에서는 혼자 있을 수 있었다. 

주말 아침의 동네 거리는 정말 조용했다. 우리 집은 성산동과 연남동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다. 홍제천이 바로 앞이었고, 홍제천의 지류를 복개해 만든 길에 면해 있었다. 일제시대 때 행해진 직강공사로 복개하면서 현재의 수계를 갖게 되었지만, 원래는 우리 집, 서울 빌라가 위치한 지점에서 지류가 망원동 쪽으로 흘렀었다. 하천은 덮였지만, 흔적은 '길'로 남았다. 어릴 때는 이런 역사가 있는 줄 몰랐지만, 나는 이 길을 따라 걷는 것을 좋아했다. 반듯한 주변과는 다르게 좁고 변화무쌍한 영역이어서 재밌었다. 


1946년 미군정시절 지도/ 성산 오른쪽과 아래에 옛 홍제천의 흔적 표시 (위키백과)


2015년 지도에 분홍색 점선으로 옛 홍제천의 흔적 표시 / (위키백과, 오픈스트리트맵) 

지도 출처 (위키백과) 


주변의 반듯한 지역은 60년대 토지구획정리사업(구역명 : 성산)에 의해 조성된 단독주택 지역이다. 필지 단위가 꽤 큰 편으로, 마당과 주택도 으리으리하다. 우리 집과 다르게 크고 멋집 집들을 구경하며 길을 걷다가 골목으로 쏙 들어가기도 했었다. 구획 정리된 지역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골목들이 인접해 있어서 양쪽을 왔다 갔다 하는 게 재밌었다. 으리으리한 주택과 높고 매정한 담장에 둘러싸인 널찍한 직선의 길을 걷다가, 갑자기 낡고 나지막한 집들이 모여있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동네에 온 듯했다. 떡국떡, 참기름, 들기름 등을 사러 가던 방앗간,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다녔던 피아노 학원, 가끔 생긴 용돈으로 과자 사러 가던 동네 슈퍼를 지나면서, 전시 작품을 감상하듯 찬찬히 구경했었다. 목적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닌, 산책 중 지날 때면 동네 가게들은 특별한 작품처럼 보였다.  


주변을 구경하다가도
문득 다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었다. 

당시에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보이는 주변 풍경에 대해 생각했을 수도 있고,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나오기도 했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혼자만의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다시 유순한 둘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모나고 뾰족해졌던 마음이 다시 부드러워져서, 이제 시작되는 하루의 낮과 밤을 둥글둥글하게 보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좁은 집에서 내 마음을 지키며, 가족들과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고 행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집을 나가 동네를 걸으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짜증과 예민함이 폭발해 더 자주 싸웠을 것 같다. 집을 나와 걸었던 동네는 나에게 위안이었고, 도피처가 되기도 했었고, 재밌는 놀이이기도 했다. 산책할 때마다 전에 걸었던 길은 피해서, 안 가본 길로, 가본 지 오래된 길로 걷곤 했었다. 그래서 매번 새로웠고 흥미로웠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집 근처 동네는 집의 연장선상에 있는 장소였다. 동네까지 포함해서 '집'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오히려 집 안에서보다
동네 길이라는 가장 공적인 공간에서
가장 사적인 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 그 서울 빌라는 사라지고 없지만, 근처 동네 길을 남아있다. 오래전, 정비사업을 추진한다며 동네에 초고층 타워 조감도가 걸려 있기도 했었지만 지지부진하더니, 그런 얘기가 쏙 들어갔다. 서울 빌라는 3년 전에 옆 빌라와 함께 헐려 도시형 생활주택으로 바뀌었다. 정비사업을 추진했다면, 빌라는 물론이고 동네까지 사라졌겠다는 생각을 하면, 길이라도 남아있는 게 다행이다 싶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는 산책을 하지 않는다. 지금은 방을 혼자 써서 혼자만의 시간을 집에서도 가질 수 있어서 이기도 하지만, 옛날 동네만큼 재밌거나 걷기 좋지가 않기 때문이다. 이 동네는 길은 너무 좁고, 자동차가 많이 다니며, 고밀 주택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이곳에 와서 지내다 보니, 예전 성산동 동네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절감하게 되었다. 토지구획사업의 결과물인 단독주택지와 자연발생적인 골목길이 공존했던 동네. 길마다 건축연도가 다양해 60년대부터 90년대 2000년대 주택/빌라 양식을 구경할 수 있었던 곳. 부잣집과 덜 부잣집, 저렴한 집을 구경할 수 있었던 곳. 

그런 곳이었기에 걸으며 구경하는 것만으로 재미있었겠지 싶다.


과연 앞으로도 예전 성산동처럼, 집뿐만 아니라 주변 동네까지 '집'으로 인식될 수 있는, 그런 동네를 만날 수 있을까? 아마 지금 성산동도 예전 내 기억처럼 남아 있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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