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증금 받기도 존버(?)
((지난 이야기))
이삿날 아침, 오피스텔 전세 보증금을 떼인 세입자 김 씨. 이미 몇 달의 기한을 준 터라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김 씨에게 되려 삿대질을 하며 길길이 날 뛰는 집주인. 결국 1억 원대의 큰 금액 앞에서 세입자가 먼저 사과를 했지만 집주인이 사과를 받아주지 않아 결국 27년 인생 첫 소송전을 시작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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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집으로 들어가세요."
계약서를 작성한 후, 아니 그 전부터 변호사가 가장 먼저 한 말이다. 다시 들어가란다. 침대도 버리고 자질구레한 생활집기 모두를 새 집으로 옮겼는데 그 지긋지긋한 집에 다시 들어가라니? 변호사는 임차권등기명령신청부터 해야 소송을 진행할 수 있다며 그러려면 그 집에서 계속 살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날밤 용달차를 불러 쇼파베드와 캐리어 하나를 옮겨 아무것도 없는 그 집으로 들어갔다.
나 : 엄마, 다시 들어왔어.
엄마 : 잘 수 있겠어? 침대라도 버리지 말걸.
나 : 아냐. 쇼파베드 안 버려서 다행이지. 지방 출장 갔을 때랑 비슷하네. 캐리어 하나 끌고.
엄마 : 문 꼭 잠그고 자. 아침에 일어나서 통화하고.
사실 그날 저녁, 무섭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방법은 없었다. 1억 4천은 나에게 너무 큰 금액이었다. 4년간 회사에서 받은 연봉을 다 합쳐도,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도 손에 겨우 쥘 수 없는 그런 돈이었다. 객관적으로도 27살에게 1억은... 무서운 그 상황을 견뎌야만 하는 그런 돈이다.
마침 그때 난 퇴사가 결정돼 있었다. 적은 연봉으로 알차게 모았고 4년간 일했으니 몇 개월 쉬면서 구직활동을 할 생각이었다. 차라리 낮에 일이라도 하러 갔다면 마음이 덜 힘들었을 것 같다. 가뜩이나 대학생 때부터 쉼 없이 달려 온 나에게 꿀 같은 휴식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지만 현실은 새장 속에 갇힌 새 신세였다. 혹시나 집을 비운 걸로 오해를 받을까봐 고향 집에도 내려갈 수 없었고 여행도 갈 수 없었다. 거의 매일 같이 집을 나와서 산책을 했다. 2시간... 3시간... 하루종일 걸어다녔다.
2주면 임차권등기명령신청이 완료된다고 했던 변호사는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다. 법원의 일처리가 이렇게 늦다니... 그래도 소송을 시작하기 전에 집주인이 연락을 하길 내심 기대했다. 역시나 단 한통의 전화도 받을 수 없었다. 오히려 임차권등기명령신청과 관련해 법원에서 등기우편으로 집주인 측에 서류를 보냈는데 집주인이 그 서류를 수령 거부하고 있단다. 변호사도 혀를 내둘렀다. 이런 경우는 잘 없단다.
답답한 상황에서 그만둔 직장에서 연락이 왔다. "김 대리, 잠시 알바라도 할래?" 퇴사한지 일주일 밖에 안된 시점이었다. 그래도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알바가 끝나면 새 집으로 갈 수 있겠다 싶었다. 회사 사람들과 인사한지 겨우 일주일, 다시 회사를 찾았다. 선배들이 날 보고 걱정을 했다. "그동안 밥을 못 먹었어?" 정확히 일주일 만에 살이 쭉 빠져 있었다. 밥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아서 겨우 하루에 빵 하나 먹고 계속 산책을 했으니 당연했다.
그날도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와 소송 문제 때문에 통화를 했다.
나 : 엄마... 미안해요. 나 서울에서 편하게 살라고 빌려준 돈인데.
엄마 : 어쩔 수 없지.
나 : (엉엉 울었다.) 미안해 엄마.
엄마 : 이제 시작인데 이렇게 울어버리면 어떡해. 마음 강하게 먹을 거 아니면 그냥 집주인이 하라는대로 기다리는 게 낫지.
엄마의 그 말에 단단해지기로 결심했다. 딱 그날만...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펑펑 눈물을 쏟았다.
알바하기로 했던 기간이 끝날 무렵이었다. 어느덧 그 집에서 지낸지 4주차가 되었다. 드디어 변호사가 등기 완료됐다고 알려왔다. 드디어 그 집을 나올 수 있었다. 집주인에게 이사를 알릴 겸 미처 정산하지 못한 공과금도 정리할 겸 다시 전활 걸었다.
나 : 아저씨 저 오늘 짐 뺍니다. 공과금 드릴 거 좀 알려주세요.
집주인 : 왜 맘대로 도로 왔다가 짐을 빼요? 그리고 누가 멋대로 법적으로 하랬어요.
나 : 네? 아저씨가 그러셨잖아요. 법대로 하라고.
집주인 : 내가 언제. 아가씨가 먼저 법적 조치한다고 했잖아.
나 : (뭐 내가 먼저 말하긴 했지) 아저씨가 법대로 하라는 말씀 하셨어요.
집주인 : 집 다 원상복구 하기 전까지 명도 안 받아.
나 : 맘대로 하세요. 더이상 연락은 안 합니다. 변호사랑 얘기하세요.
뚝-. 어차피 말이 안 통할 건 알고 있었다. 본인이 아쉬운 소리는 단 한번도 하시지 않았고 사정 얘기하는 전화도 받은 적 없었으니. 게다가 본인의 생각대로 일이 안 풀리자 마지막으로 꺼내든 카드가 바로 이것이었다. 원상복구.
첫 입주 당시에 부동산이 '에고 이건 집주인한테 수리해 달라고 말해 둘게요.'라고 했던 화장실 문, 전 세입자가 집주인과 싸우고 가져간 커텐 등 2년간 살면서 내내 수리를 요구했던 부분들을 나에게 덤터기를 씌우셨다. 마치 내가 집을 험하게 쓰고 원상복구하지 않아서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것처럼.
어차피 상황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도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멈출 수 없었다. 한달간의 점거기간이 끝나고 소송이 시작됐다. 집을 나오면서 다시 공과금 정산하자는 문자를 했다. 역시나 답장이 오지 않았다. 아마도 바쁘셨겠지.
새 집으로 들어간 나는 변호사를 믿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려고 노력했다. 몇 개월만에 엄마가 해주는 밥 먹으러 고향에도 내려가고 퇴사 전 꿈 꿨던 해외여행도 갔다. 돌아와서는 이력서도 쓰고 면접도 보러 다녔다.
((예고편))
고소장을 받은 집주인이 말하길, "세입자가 이사 나간다고 말 안했어." 훗. 아저씨. 그거 아세요? 그동안 아저씨랑 통화했던 모든 전화내용이 녹음돼 있어요. 1월 말 열린 첫 재판. 명백히 내 돈이기도 하고 차고 넘치는 증거까지 있는데... 반년이면 끝날 줄 알았던 1심, 언제 끝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