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역 - 춘천시 신동명 증리 실레마을
아침에 쓰레기를 버리려고, 그 참에 빵도 사 와야겠다 싶어 장바구니를 덜렁 옆에 끼고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집을 나섰다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끼어 즉흥적으로 지하철 역에 들어섰다. 미세먼지가 심하기는 하지만 기온이 온화하니 지하철로도 갈 수 있다는 춘천이나 가볼까. 대충 입고 나왔더니 이른 아침이라 살짝 쌀쌀하긴 하다.
경춘선으로 6-70분 정도 걸리니 행여나 자리가 없으면 서서 가기에는 너무 멀다. 평일 오전이니까 괜찮겠지? 잠시 고민하다가 상봉역으로 향했다. 청량리역은 너무 복잡하고, 별내역은 자리가 없을지도 모르고, 배차 간격이 길어 한참 기다려야 할 수도 있으니 부대시설이 있는 상봉역이 좋겠다. 혹시나 사람이 많아 서서 가야 할 것 같으면 별내역에서 내려 다시 서울로 돌아와야지.
과한 고민이었다. 상봉역에서 기다리니 8시 21분에 텅 빈 열차가 도착했다. 중간에 몇몇 사람들이 오르고 내리지만 가는 내내 자리는 충분했다. 대성리, 청평, 가평, 강촌, (민박집에서 술 마시던 기억 밖에 없지만) 익숙한 지명들이 지나간다.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 훅 병풍처럼 둘러선 아파트 산맥이 나타난다. 아니 이런 곳에도, 싶어 살짝 징글징글하다. 지방은 소멸된다는데, 그래 차라리 인간이 한 곳에만 밀집해 살고 다른 곳은 버려두는 게 나을 거 같다.
막상 춘천역이 가까워지니 춘천 시내에 내려 뭘 해야 할지 떠오르는 게 없다. 후다닥 김유정역에서 내렸다. 발 가는 데로 산책하기에는 역시 고즈넉한 시골마을이 좋겠지.
김유정 폐역과 관광안내소로 쓰이는 기차 안을 둘러보고 마을로 발길을 돌렸다. 문 연 카페가 있어 들어갔다. 테이블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던 주인장이 일어난다. 오늘은 일찍 닫을 거라고 한다. 손님은 나 혼자이고, 오늘 하루 나 한 사람뿐일 것 같다. 커피를 마시며 창 밖을 보며 잠시 앉아있었다. 꾸미지 않은 사람 사는 시골 마을이다. 인심 좋은 주인장은 주문하지도 않은 것들을 이것저것 가져다준다. 사장님, 이렇게 해서 남는 게 있나요, 속으로 말하다가 생각해 보니, 임대료를 내지 않고 자기 집 1층에서 운영하면 가능할 것도 같다.
동네 할머니가 떡을 했다며 가져와서 나누어 준다. 엄청 정정해 뵈는데 91세라고 한다. 동네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시다고.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남의 도움 없이 내 일상을 영위하고 이웃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는 노년. 떡은 못 만드니 결국 돈으로 해결해야 하나, '어이, 너무 많이 주문했어, 좀 가져가.'
걷다 보니 책방을 마주쳤다. 한 때는 카페도 겸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음료를 팔지 않는다고 한다. 책만 파는 책방, 당연한 듯 당연하지 않은 책방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도 없다. 신간도 있지만 중고책이 더 많다. 그림엽서와 간단한 기념품도 있다. 카페였던 흔적인지 곳곳에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많다. 주인 없으면 편하게 놀다 가라고 쓰여 있다. 구매자를 위한 계좌번호도 붙어 있다. 좁은 가게에 빼곡히 오래된 물건과 책이 쌓여 있는데 책장과 테이블에 먼지 하나 없다. 내 집보다 깨끗하다.
책이 팔리긴 하려나. 그래도 역시 임대료가 없다면 조금 넉넉한 마음을 가질 순 있을 것 같다. 멋지고 부럽다. 나도 이런 공간을 만들며 살아보고 싶다.
역 앞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고, 11시 57분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생각해 보니 편의점 삼각김밥은 처음이다.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도 먹어보고 도시락도 먹어보고 김밥도 먹어보고 햄버거도 먹어보았지만 삼각김밥은 먹은 적이 없다. 그래서, 난생처음 초보 삼각김밥러는 비닐 뜯기에 실패했다. 김이 눅눅해지지 말라고 밥과 김 사이에 끼워 놓은 비닐이, 반쪽만 벗겨지고 반쪽은 빠지지가 않아 결국 밥만 손으로 꺼내먹고 김을 따로 먹었다. 오기가 생겨서 제대로 뜯을 수 있을 때까지 몇 번 더 사 먹어야겠다 다짐한다.
올 때는 열차에 사람이 조금 더 많아 자리가 얼추 다 차더니만 평내호평역에 이르니 서서 가는 사람이 생겼다. 날이 더 따듯해지면 어떨지 모르겠으나, 평일 오전 7시 30분에 집을 나서면 쾌적하게 춘천에 갔다 올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종종 가볍게 들러야겠다.
왕복 지하철 요금 : 6,000원.
편의점 라면+삼각김밥 : 2,100원. (네이버페이 포인트 사용)
커피+쿠키 : 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