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신상보다 단단한 일상의 쓸모
오랜만에 기장 나들이를 갔다. 먼저 롯데 아웃렛. 입학 시즌에 맞춰 새 가방, 새 옷, 새 신발, 새 지갑까지 취향껏 고른 아이는 꽤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다음은 이케아. 내가 쇼핑할 차례였다.
광활한 쇼룸으로 들어서자 휙휙 돌아가는 눈만큼 빠르게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이 돌았다. 예전부터 갖고 싶었던 흔들의자를 발견하곤 혼자 앉았다 일어났다 분주했다.
이전에 육아 달인 유튜버의 집에서 안락의자에 앉아 책 읽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다. ‘우리 아이도 저 의자만 있으면 책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몇 번이고 가격표를 확인하는 내 마음이 의자처럼 흔들거렸다.
어느 순간 충동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저 의자가 과연 우리 집에 어울리는 것인가는 쏙 빼놓고 어디에 놓지부터 고민했다. 마땅히 놓을 곳은 없지만, 잘 꾸며진 쇼룸을 보니 그냥 갖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흔들의자 하나쯤은 저질러도 되지 않나?'. 남편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주섬주섬 카드를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근데, 여보, 이거 진짜 필요해?” 남편의 한마디에 개업하는 가게 앞에서 춤추던 바람 인형처럼 나부대던 마음이 쑥 내려앉았다. “아니, 그냥 한번 본 거야.”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요즘 들어 예쁘고 감각 있는 물건으로 집을 꾸미고 싶다. 알록달록한 스티커와 뽀로로 매트로 정신없던 시기가 지나서다. 경제적인 여유도 생겼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현실은 녹록지 않다.
멀쩡히 제 몫을 하는 물건을 버리고 새 상품을 사자니 지구에게 미안하다. 인플루언서들처럼 용도마다 물건을 들여 쓰자니 미니멀리즘에 대한 다짐이 무색하다. 남이 쓰던 건 싫지만 내 손때가 묻은 빈티지를 만들고 싶은 로망은 있다.
하지만 이 모두를 압도하는 결정적인 문제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일관된 취향을 모르겠다는 거다. 과연 나에게 취향이란 게 있기는 한걸까?
가끔 SNS 속에서 취향의 홍수에 잠식당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SNS에서는 쉴 새 없이 신상들이 쏟아진다. 바란 적 없는 '알고리즘의 축복' 아래 나도 몰랐던 취향을 알고리즘에게 '발견'당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세상 사람들 다 아는 건데 나만 모르고 있지는 않았나 새삼 초조해진다. 빛나는 신상들과 비교해 내 취향이 초라하거나, 고리타분해 보이지는 않나 주춤거리게 된다.
정말로 나는 취향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소리 높여 내 취향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취향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기억하지 못했을 뿐. 나는 매 순간 주어진 범위 안에서 최선을 고르려 노력했다.
아이의 책가방을 고를 때도 그랬다. 바느질은 꼼꼼한지, 무겁지는 않은지 살폈다. 아이는 이 가방을 메고 본격적인 입시경쟁에 발을 들이게 될 테다. 나는 무거운 책들을 짊어지고 다닐 아이의 고생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가방을 찾았다.
이렇게 돌이켜 보니 나의 취향은 나의 색깔을 드러내는 수단이라기보다 가족의 편안함을 우선하는 책임감에 더 가까웠다. 언제고 쉽게 버려질 수 있는 '예쁜 쓰레기'보다 가족의 일상을 편안하게 도와줄 '쓸모 있는 물건'에 초점이 맞춰졌던 것이다.
다시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취향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나의 취향은 반짝반짝 빛나는 신상은 아니다. 화려한 존재감도 없다. 하지만 아이의 어깨를 걱정하던 마음, 지구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일상의 쓸모를 고민하던 그 깐깐한 시선들이 겹겹이 쌓여 나만의 기준이 만들어졌다.
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유행을 좇지 않았다고 해서, 혹은 쇼룸의 물건을 덜컥 따라 사지 않았다고 해서 내 취향이 부재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동안 '나'라는 개인의 기호 대신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안온함을 선택하며, 가장 정직하고 따뜻한 감각을 적립해 온 셈이다.
어느덧 인생의 중반을 넘어가며, 나만의 취향에 따라 꾸며온 관계와 공간이 있음을 깨닫는다. 남의 눈에 근사해 보이는 공간이 아니라, 내 손때 묻은 물건들이 나만의 빈티지로 익어가는 곳. 화려한 브랜드, 이름표보다 신뢰할 수 있는 가치가 우선인 삶. 그 느리지만 확고한 선택들이 모여 비로소 '나'라는 사람의 결을 완성해 갈 것이다.
오랜만의 이케아 나들이에서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발걸음은 가볍다. 물건은 사지 못했어도,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지에 대한 확신은 한 뼘 더 적립되었다.
나만의 기준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30편에 걸쳐 써내려 갈 예정입니다. 구독해두시면 다음 이야기가 찾아갑니다. 다음엔 10번도 들지 못한 명품 가방이 남긴 특별한 영수증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