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도 들지 못한 명품 가방이 남긴 영수증

확신이 있는 사람은 결제 후에 후기를 찾지 않는다.

by 한걸음
특별한 영수증을 남긴, 열 번도 들지 못한 가방


카드를 긁는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매장 문을 나서기도 전에 후회가 밀려왔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오래도록 블로그에서 구매 후기를 뒤졌다. “진짜 이쁜 가방이야. 잘 산 거야.” 읽은 후기가 늘어날수록 나는 안심했다. 많은 이들의 찬사가 나를 설득했다. 돌이켜보니 그 행동 자체가 이미 답이었다. 확신이 있는 사람은 결제 후에 후기를 찾지 않는다.


세 번의 경고음, 나는 진즉 알고 있었다.

누군가 예쁘다고 권해서 산 운동화들은 번번이 신발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반면 내가 예쁘다고 산 신발은 뒤축이 닳고 천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신었다. 웃긴 건, 똑같은 디자인인데 다른 사람이 사라고 할 땐 안 예뻐 보였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예뻐 보일 때다. 그렇게 산 운동화가 내 최애가 됐다. 삑!



명품관에서 무심코 했던 말을 흘려듣지 않은 남편이 내게 가방을 선물했다. 가방은 예뻤고, 남편의 사랑이 고마웠다. 하지만 그 가방은 뚜벅이를 위한 가방은 아니었다. 통가죽이라 무거운데 어깨끈이 얇았다. 가방을 멜 때마다 안 그래도 무거운 인생의 무게가 더해지는 느낌이었다. 삑! 두 번째.



남편이 선물한 양가죽 지갑은 부드러웠다. 문제는 내가 지갑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신분증, 카드, 인증서, 각종 자료까지 핸드폰만 있으면 못 할 일이 없었다. 나는 핸드폰 하나에 온전히 담기는 사람이었다. 어느 순간 지갑은 서랍장 안쪽에 조용히 모셔졌다. 삑! 세 번째 경고음이 울렸다.



잠깐의 허기가 그날의 나를 사로잡았다.

동생의 미국 지인이 엄마와 내게 스카프를 선물했지만 맬 일이 없어, 가방으로 바꾸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매장에 가보니 가방은 내 예상보다 훨씬 비쌌다. 게다가 보부상인 내게 맞는 모델이 하필 없었다. 마음에 드는 가방이 정말 하나도 없었다. 그때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점원이 권한 신상을 엄마와 동생이 정말 마음에 들어 했다. 그걸 사서 엄마랑 같이 들면 된다는 동생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400만 원을 얹어 쿨하게 카드를 긁었다. 내가 진짜 쿨했나? 모를 일이다.



나를 확신시켜 줄 후기가 필요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내내 후회했다. 그리고 계속 후기를 찾았다. 쿨하지 못하게. 나는 안심하고 싶었다. 그때 왜 멈추지 못했을까? 나는 명품 앞에서만큼은 초연한 사람이었는데. 그냥 그날은 좀 피곤했던 것 같다. 가격 따지지 않고, 그냥 사고 싶으면 사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건 욕망이라기보다는 잠깐의 허기였다. 그래도 괜찮은 사람의 역할에 대한 허기. 내가 오랫동안 모른 척했던 허기다.



나는 합리적으로 보일 법한 행동에 책임감을 느꼈다. 하나를 사더라도 더 나은 선택지가 없는지 따졌다. 혹시 내가 모르는 정보나 놓친 가능성이 있을까 몇 번이고 다시 생각했다. 그날은 그 엔진이 꺼진 날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한 번쯤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만의 빈티지를 만들어 간다.

그 가방은 지금도 옷장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들까 말까. 지금껏 열 번을 채우지 못한 것 같다. 반면 내가 매일 드는 가방은 13년 묵은 검은색 백팩이다. 양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고, 무거운 짐도 가볍게 만드는 미덕이 있다. 붕 뜨는 시간을 대비한 책 한 권을 시작으로 다이어리, 필통, 화장품 파우치는 기본이고 어떤 날은 운동복을, 어떤 날은 일거리를 담는다. 이 가방은 내 하루를 통째로 담을 수 있다.


13년을 동고동락한, 나와 같이 은퇴하게 될 것만 같은 가방


13년 동안 가방은 두 번의 수선을 거쳤다. 금속 지퍼가 고장 나 한 번, 가죽 고리가 삭아 또 한 번. 고리를 수선할 때는 천 고리를 선택했다. 수선비가 결코 싸지 않았는데 의뢰할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이 가방은 언제까지 나와 함께 다니게 될까? 찢어지지만 않는다면 끝까지 들어봐야겠다.’ 가방은 나만의 빈티지가 되었다.



500만 원짜리 명품 가방과 13년짜리 빈티지 가방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게 했다. 나는 가격이 싸든 비싸든 결이 맞지 않는 물건은 뒤편으로 보내는 사람이었다. 요즘은 물욕이 올라올 때마다 명품 가방을 떠올린다. 예쁘긴 한데 사놓고 안 쓰면 어쩌지? 과연 내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물건인가? 이걸 안 사면 다른 걸 할 수 있는데. 이런 생각들이 오히려 나다움을 지키는 경고음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명품 가방이 남긴 특별한 영수증

영수증은 오래전에 버렸다. 버리지 않았어도 어차피 색이 바래 흐려졌을 것이다. 영수증이 원래 그렇다. 시간이 지나면 금액도, 날짜도, 흔적도 없이 하얗게 지워지는데 이상하게도 그날 카드를 긁던 그 순간만큼은 갈수록 선명하다. 가방의 진짜 가격은 후회였다.





당신의 옷장 한편에도 열 번을 채우지 못한 무언가가 있지 않나요? 그것이 정말 당신의 선택일까요? 다음 이야기는 우리의 선택을 조용히 설계하는 알고리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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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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