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고향에 내려와 유치원 교사를 하는 루카스. 아들 문제로 전처와 갈등은 있지만 새로운 여자 친구를 만나고 고향 친구들과 사냥도 하고 술도 마시며 평온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친구 딸인 유치원생 클라라의 사소한 거짓말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상상력 풍부하고 예민한 이 아이는 자신에게 무심한 부모 대신 루카스의 다정함에 그를 좋아하게 된다. 클라라의 행동을 따끔하게 충고하는 루카스에 대해 아이는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졸지에 루카스는 아동을 성추행한 범죄자가 된다.
클라라는 이 이야기를 유치원 원장에게 말하게 되고 그 후 마을 전체에 퍼져 사람들은 그를 공공의 적으로 규정한다. 그 후 루카스는 마을에서 이방인이 되었고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크리스마스이브날, 교회에 간 루카스는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하며 원망과 억울함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거짓말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루카스와는 둘도 없는 친구, 테오에게 달려가 말한다.
영화 <더 헌트> 의 한 장면
"내 눈을 봐! 내 눈을 보라고! 내 눈에 뭐가 보여?"
"나 좀 그만 괴롭히라고!"
1년이 지난 후, 루카스의 누명은 벗어졌지만 사냥을 하러 나간 곳에서 누군가가 루카스에게 총을 겨눈다. 총을 겨눈 자는 실루엣으로 처리돼, 알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루카스에게 덧씌워진 오명은 여전히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총소리에 놀라서 뒤돌아 보는 루카스가 두려워하는 모습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위의 이야기는 영화 <더 헌트>의 내용이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어른들의 신념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시키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잘못된 신념은 진실을 외면하고 집단적 폭력으로 이어진다. 루카스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그가 거짓말을 한 아이와 대화를 하고 싶어도 어른들은 매정하게 차단시켜버린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진실만을 말하므로.
<더 헌트>가 아이의 거짓말로 한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갔다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에서는 평론가의 말 한마디가 총망 받던 예술가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평론가의 말은 금세 신문에 실렸고 그 후 예술가는 이 말을 곱씹기 시작한다. 주위 사람들은 그녀의 작품에 '깊이가 없다'를 말하기 시작하고 그녀는 점점 그 말에 집착을 한다. 그 후 그녀는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았고 그녀의 삶은 피폐해져 갔다. 결국 그녀는 죽음을 선택했다. 이 사건은 곧 흥미로운 먹잇감이 되어 각종 언론에 보도된다. 그녀가 죽은 후 '깊이가 부족합니다'라고 말하던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듯하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이고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평론가의 말 한마디에 스스로의 삶을 포기한예술가, 앞과 뒤가 다른 줏대 없는 평론으로 예술가를 죽음으로 몰게 한 평론가, 인간의 죽음이 단지 뉴스거리 밖에 되지 않는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언론. 소설 속의 이야기는 현실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과연 평론가 만이 문제였을까? 자신의 가치보다 타인의 평가에 의미를 두었던 예술가의 태도를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더 헌트>의 '거짓말'과 <깊이에의 강요>의 '말 한마디'가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지는지 보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닥친 상황에서 루카스는 외로운 싸움을 했고 젊은 예술가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차이가 있다.
<더 헌트>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루카스에게 덧씌워진 누명은 실제로 마을 사람 어느 누구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단지 아이의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유치원 원장이 있을 뿐이고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잘못된 신념만이 유일한 증거일 뿐이었다. 그리고 기억의 파편들 속에 억지로 꿰매진 아이들의 말 한마디는 상상의 날개를 타고 마을 전체에 잔인하게 울려 퍼진다. 이와 같이 세상의 부조리와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무참히 무너지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여기, 죽음에 이르러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저항하는 한 남자가 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등장하는 뫼르소가 그 주인공이다.
소설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한다. 뫼르소는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그 다음 날, 여자 친구와 해수욕을 하고 사랑을 나눈다. 이웃인 레이몽은 그의 여자 친구를 혼내 줄 생각으로 뫼르소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하고 그는 이를 수락한다. 그 이후 레이몽에게 원한을 품은 아랍인들이 레이몽을 해치려 한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뫼르소는 총을 가지게 되고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여기까지가 1부의 이야기이고 2부는 법정에 선 뫼르소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그런데 명백히 살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방향은 '살인'보다 뫼르소의 '행동'에 초점이 맞춰진다. 1부에서 보인 뫼르소의 행동들은 '우연한 살인'이 아닌 '계획적인 살인'을 저지른 파렴치한 인간으로 규정하는 단서가 된다. 그리고 뫼르소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뫼르소는 무덤덤하고 냉소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는데, '이거나, 저거나 매한가지다'라는 말을 하고 여자에게 욕정을 느끼지만 그것이 사랑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언제나 명확하지 않고 모호하다. 그리고 그가 엄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담배를 피우고 음료를 마셨다는 이유로, 엄마의 관을 열어 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례식 다음날 여자 친구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이유를 들어 윤리적인 잣대로 그를 평가한다.
"배심원 여러분, 어머니가 돌아가신 바로 다음 날 이 사람은 해수욕을 했고, 부적절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희극 영화를 보러 가서 시시덕거렸습니다.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법정에서 검사가 말한 장면은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듯 우스꽝스럽다. 그가 저지른 잘못 보다 엄마의 장례식에서 행한 그의 행동을 살인과 연관성을 짓고 '사전에 계획했음'을 단언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사형은마땅하다고 말한다. 재판장은 살인을 저지른 동기를 명확히 말해달라고 한다. 그리고 뫼르소는 거짓 없이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라고 말한다. 법정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후 신부는 뫼르소를 찾아가서 회개할 것을 권하지만 뫼르소는 전과 달리 확실하고 단호하게 저항한다.
".....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 가진 존재야. 세상엔 특권 가진 사람들밖에 없어. 다른 사람들도 역시 장차 사형 선고를 받을 거야. 신부인 그 역시 장차 사형을 선고를 받을 거야. 만약에 그가 살인범으로 고발당하고 자기 어머니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당하게 된다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살 라마노의 개나 그의 마누라나 그 가치를 따지면 매한가지야."
그리고 뫼르소는 죽음이 가까워진 순간에 오히려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한다.
"...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부조리, 허위, 권력이 둘러싼 세상의 축소판인 법정에서 뫼르소는 스스로 이방인을 자처했다. 그리고 법정에 모인 사람들은 '살인을 저지른 것은 단지 태양 때문이다'라고 말한 뫼르소를 철저히 이방인으로 보았다. 하지만 부조리가 만연한 세상에서 자신이 진실만을 말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는 것을 그는 깨닫는다. 그리고 죽음이 다가오자 뫼르소는 더없이 평온하고 행복한 모습을 보인다.
<더 헌트>는 한 아이의 거짓말을 둘러싼 어른들의 잘못된 신념이 한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깊이에의 강요>는 앞과 뒤가 다른 일관성 없는 평론가의 말 한마디에 지나치게 타인을 의존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불신하는 예술가가 결국은 스스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모두는 결국 세상에 존재하는 진실을 보지 못하고 부조리와 허위,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끊임없이 휘둘리는 나약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거짓 없이 진실을 추구한 자신의 모습에서 행복을 느꼈고 죽음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