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깊은 산사(山寺). 계절은 늦가을. 삭풍이 일지 않아 대나무 잎사귀 흔들리는 소리조차 희미했다. 청현은 차분히 먹을 갈았다. 그는 이 절의 고아로 자라 묵향과 불경 소리 외에는 배운 것이 없는 스물 남짓의 서승(書僧)이었다. 조용했으나 왠지 모르게 공허한 밤.
문득, 문 밖에서 낯선 인기척이 났다. "계십니까." 굳고 낮은 목소리. 청현이 조용히 문을 열자, 시린 달빛 아래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등에 검은 보따리를 메고, 갓 아래로 드리운 그림자가 얼굴의 반을 가렸다. 사내는 다급한 기색 없이, 그러나 쉬이 긴장을 놓지 않는 매서운 눈빛이었다. "하룻밤, 신세 좀 지겠소."
그 사내, 무영(無影)은 사흘을 머물렀다. 청현은 묵묵히 그를 맞았고, 무영은 말없이 밤을 보냈다. 사흘째 되는 밤, 청현은 밤잠이 오지 않아 뜰을 거닐었다. 대청마루에 기대앉아 있던 무영이 그를 불렀다. "잠 못 드시오?" "고요해서, 잠이 달아났습니다."
무영은 품에서 옥으로 만든 작은 술병을 꺼내 들었다. "이런 밤에는 술을 마셔야 제 맛이오." 그는 혼자 홀짝이더니, 이내 청현에게 건넸다. "이런 곳에 계시면서, 술 맛은 아시오?" 청현은 조용히 술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맑고 차가운 맛이 목을 태웠다. "독합니다."
무영은 피식 웃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그의 얼굴 윤곽이 비로소 또렷했다. 날카로운 콧날과 굳게 다문 입술. 무영이 청현의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우며 말했다. "세상은 이보다 더 독하지." 청현은 그의 눈을 보았다. 그 깊은 곳에 켜켜이 쌓인 세월의 고독함이 스며 있는 듯했다.
"무영님은 무엇 때문에 그리 홀로 다니십니까?" 청현의 물음에 무영은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는 옥 술병을 빙글빙글 돌리며 답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서." 그 말에 청현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왠지 모를 동질감이었다.
청현은 붓글씨에 평생을 바쳤으나, 정작 그 글씨를 진정으로 보아줄 이 하나 없었다. 그는 붓을 잡지 않는 이 손이, 이 밤의 고독과 함께 무영에게 닿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희미하게, 손끝이 시큰거릴 만큼만.
무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보따리를 다시 어깨에 메었다. "떠날 때가 되었소." 그가 돌아섰을 때, 청현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다음에, 또 오십니까?" 무영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으나, 끝내 뒤돌아보지 않고 낮게 속삭였다. "인연이 닿는다면."
그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청현은 오랫동안 대청마루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의 혀 끝에는 여전히 독한 술의 잔향과, 무영의 눈에 담겨 있던 깊은 고독함이 아련히 남아 있는 듯했다. 청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영이 앉았던 자리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차가웠으나, 왠지 모르게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