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폭풍의언덕"> 리뷰
* 스포일러주의! 본 리뷰는 영화<"폭풍의 언덕">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부터 캐시와 넬리는 죽음과 삶이 어지러이 섞여드는 교수형집행장의 광경을 목격한다. 죽는 이의 숨소리는 마치 성교를 하는 남성의 숨소리의 그것이고 죽는이의 몸에는 발기한 성기가 그대로 라인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가 힘겨운 마지막 숨을 내쉬고 죽자 주변은 온통 섹슈얼한 무드의 축제가 된다. 죽음의 현장에서 삶의 축제가 이어진다. 영화는 삶과 죽음이 얽혀드는 한복판에서 욕망을 집요하게 포착하고 변주한다.
그 속에서 캐시와 넬리는 각기 다른 본능에 눈을 뜬 것 같다. 캐시는 타나토스-죽음을 향한 충동에, 넬리는 에로스-삶을 향한 충동에.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같은 집에서 계속 사는 두 여자는 신기하게도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된다.
인형을 사서 집에 달려온 캐시와 넬리 앞에 나타난 캐시의 아버지. 캐시의 아버지는 자기 마음에 따라 소리도 지르고 화도 내다 집안에 소변을 보기도 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캐시의 언덕집은 욕망이 날것 그대로 '배설'되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캐시는 아버지 그대로, 남들이 이상하게 여길 욕망조차 어느 정도 분출하는 방법을 알고 자란다. 하지만 욕망의 분출이 금기시된 시대, 여성의 욕망은 가지는 것조차 금지되기에 캐시는 자신의 욕망을 발견함과 동시에 그것이 치욕스러운 것이고 더러운 것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가지게 된다.
캐시가 히스클리프가 자는 마구간에서 하인들의 가학적인 성행위를 보게되던 날, 히스클리프는 그녀의 눈을 가리지만 캐시는 오히려 자신의 성욕에 눈을 뜬다. 히스클리프는 캐시의 피할 수 없는 성욕이 향하는 사람이자, 캐시의 욕망 그 자체가 된다. 그 욕망을 그대로 품고가면 캐시의 삶은 진창 속에 함께 파묻히는 삶이 될 것이 뻔하다. 하지만 그 욕망을 외면한다면, 히스클리프는 캐시보다 캐시 그 자체이므로, 그 삶은 또한 의미가 없을 것을 캐시는 깨닫는다. 캐시의 욕망은 자기모순적이며 자기파괴적이다. 이미 발견해버린 이상 함께 살아야하지만 그것은 끝내 캐시의 모든 것을 부술 것이므로. 그녀의 욕망과 그녀가 사는 시대가 캐시의 삶을 타나토스로 이끈다.
여기서 넬리의 욕망이 캐시를 가로막는다. 넬리는 캐시의 아버지가 고용한 캐시의 말벗이면서, 하녀이자 일종의 집사노릇을 하는 것 같은데, 그녀가 보는 문서들을 보면 캐시의 집이 재정적으로 곤란한 상태인 것을 알 수 있다. 넬리는 귀족의 사생아로 사실상 캐시의 집이 망하면 갈 곳이 없다. 캐시에게 딸린 레이디(는 아니지만)메이드 같은 입장에서 캐시가 자신의 욕망에 따라 히스클리프와 사는 쪽을 택한다면 넬리의 삶 역시도 진창에 빠질 것이 뻔하다. 넬리는 따듯하고 욕망이 배설되지 않는, 깨끗한 삶을 원한다. 그녀의 욕망은 그녀의 삶을 에로스로 이끈다. 넬리는 캐시를 속이기도 하고 캐시를 달래기도 해서 캐시가 부자인 에드거와 결혼하게 한다. 에드거의 집에 함께 들어간 넬리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다. 그녀가 바라던 안정되고 따듯한 삶이 거기 있기에.
캐시가 에드거랑 결혼하고 처음 맞이하는 식탁의 음식들을 보면 재료들이 투명한 젤리에 가둬져 있다. 닭발같은 것만 그냥 젤리없이 있는데 그마저도 '맛있어보이지는 않는다.' 박제된 양이 유리안에 가둬져있는 장면도 있다. 캐시는 그 양을 만진다. 젤리 안에 있는 물고기가 자신이라는듯, 물고기의 입에 자신의 손가락을 넣어보기도 한다. 음식이 식욕의 대상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 음식들은 욕망이 가둬져 있거나 거세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유리 안에 있는 박제된 양도 그렇다. 양은 죽었지만 죽지 않은 척 꾸며져 유리 '안에' 서있다. 양은 땅에 묻힐 수 없다. 양은 썩을 수 없다. 양에게 타나토스는 제거되었다.
이사벨라가 만든 인형의 집은 거세되고 가둬진 욕망들이 몰래 춤추는 곳이다. 눈이 와도 따듯하고 더러운 욕망도 침입할 수 없는 에드거의 집, 그리고 그곳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진 인형의 집. 인형의 집은 에드거의 집에서 삭제되고 사라진 것 같은 것들이 원형으로 존재하는 무의식과 같은 곳이다. 그래서 이사벨라는 실현되지 못한 자신의 욕망을 그곳에서 실현하고, 파괴하고 싶은 본능을 인형의 집 안에서 드러낸다.
이사벨라의 욕망을 숨기고 캐시의 욕망을 거세하는 에드거는 그래서, -그의 집이 기능하는 것처럼- 온건적 가부장주의의 표상으로 보인다. 밖에 눈이 오고 추워도 그의 보호 안에 있으면 따듯하고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게다가 그의 보호는 캐시 아버지와는 달리 달콤하고 변덕스럽지도 않아서 캐시는 아버지에게 벗어나게 해주고 그런 보호를 제공하는 에드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한계가 명확해서 에드거가 허용하지 않는 욕망은 그의 집안에 머물 수 없다. 이사벨라가 교수형집행식을 보러갈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고, 캐시가 괜찮다고 해도 추운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사벨라와 달리 캐시는 이 집의 양면성을 보다 뚜렷하게 체험한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혈연 혹은 혈연과 유사하게 에드거와 연결된 이사벨라와 달리 캐시는 결혼으로 에드거와 연결되어 있다.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혈연은 끊을 수 없고, 이사벨라가 받을 지참금은 이미 런던에 따로 보관되어 있어 에드거와 절연한다고 하여 이사벨라의 안전이 바로 위협받을 일은 없다. 반면에 결혼으로 연결된 캐시는 이혼당할 경우 에드거는 캐시를 보호할 의무가 없을 뿐 아니라 따로 그녀를 보호할 재산과 지위가 보장되지 않는다. 게다가 에드거의 보호를 받는 이유는 명확하게 '에드거의 후손'을 위한 것이므로, 후손을 위험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은 이중 삼중으로 (이사벨라에게보다 더한) 금기로 설정된다. 에드거의 집에서 캐시는 보호받는 대상이자,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대상화'된 존재로 살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그녀가 결혼식날 밤, 마치 상품포장과도 같은 드레스를 입은 이유다. 캐시는 에드거의 집이 따듯하기에 스스로 벗어날 수 없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수 없기에 동시에 그의 집에서 살기 어렵다.
캐시는 자신의 욕망을 에드거의 집 바깥에서 일시적으로 충족한다. 캐시가 히스클리프를 만나려고 할 때, 마치 욕망의 화신과도 같은 붉은색 옷을 입는다. 캐시가 히스클리프와 사랑을 나누는 곳은 들판, 히스클리프가 어린 시절(그리고 지금도) 머물던 마굿간, 마차 같은 곳이다. 안전하지 않고 더럽지만 그 속에 있는 캐시는 그 어느때보다 밝게 웃는다. 그들의 사랑은 붉은색이다. 열정적이며 야생의 꽃과 같이 생명력에 가득차 아름답다.
둘이 사랑을 나누는 행위가 아름답게 묘사되는 것은, -그것이 원작에는 없는 감독의 에로망가적 상상력의 구현이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캐시의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이기때문이다. 그녀의 욕망을 '보호'라는 이름 하에 가두던 에드거의 집은 아름다운 색과 풍성한 음식들로 가득차 있지만 '기괴하게' 다가온다. 반면, 히스클리프와 캐시가 함께 하는 곳들은 아무도 손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색들 속에 그녀가 있고 싶은 모습으로 그녀가 하고 싶은 행위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에드거가 만든 인공적인 캐시의 피부표현과 대비되는, 자연 그대로의 생명력이며 모든 것을 역동적으로 만들어내는 삶의 에너지 그 자체다.
하지만 붉은색은 사랑의 색이자 열정의 색이지만 동시에 피의 색이기도 하다. 그들의 사랑은 에로스로 가득차있지만 그 끝은 죽은 캐시에게서 흘러나오는 피처럼 죽음을 향해있다. 더럽고 어쩌면 모두가 피하고 싶은 무언가. 캐시에게 히스클리프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하지만 마주하지 않을 수 없는 욕망 그 자체라서, 다가갈 수록 고통스럽고 불행해지며 불 위를 걷는 것과 같은 죄악감과 치욕스러운 감정을 안겨준다. 캐시와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에로스로 아름답게 불타오르지만 주변의 한계 속에 타나토스가 되어 캐시를 잡아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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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원작을 비틀어(원작 제목에 ""를 추가해서 변주했음을 암시) 히스클리프가 아닌 캐시, 넬리, 이사벨라의 욕망을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시대적인 배경 상 여성이 가지는 욕망이 얼마나 자기파괴적일 수 밖에 없는지 -타나토스적인 측면-, 그러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아름답고 생명력 있는지 - 에로스적인 측면- 를 영화는 일관되게 그리고 있다.
원작을 각색하면서 원작의 대화가 영화에서 충분히 녹아들지 않은 부분도 보이고, 새로이 만든 히스클리프가 오해를 풀고 캐시와 사랑을 나누는 부분의 대사들은 인위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연출의 강렬함은 영화전체가 에로스적으로 다가오게도 하지만 각색이 빈약한 부분을 상대적으로 눈에 띄게 만드는 역효과도 있다. 음악과 미술 연출이 특출남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아쉽게 다가오는 것은 이런 부분들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들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쪽으로 각색한 부분은 이 모든 단점을 뛰어넘는 이 영화의 강점이다. 특히 이사벨라가 강간을 당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피학적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히스클리프와의 거래에 응한 것으로 각색한 부분은 영화를 흥미롭게 만든다. 그녀는 인형의 집에 가둬진 자신의 본능을 히스클리프를 통해 현실에 구현해내고, 계약의 균형에 맞지 않는 히스클리프의 행동은 협박을 해서라도 바꿔낸다. 캐시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면서 욕망의 에로스적인 면과 타나토스적인 부분을 자신의 몸으로 드러낸다. 넬리는 그 자신이 에로스로 불타오르는 화신이면서, 동시에 주변인들의 욕망이 얽히게 하는 기점이자 해소되는 종점 역할을 한다. 그녀가 타나토스의 화신인 캐시와 화해했을 때, (스스로 욕망했음에도) 파국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는 이사벨라를 구해내고, 캐시가 (비록 죽어서지만) 자신의 욕망인 히스클리프와 만나게 해준다. 여성이 여성을 구원한다.
죽음과 삶은 일견 서로를 미친듯이 멀리할 것 같지만 죽음을 향한 충동은 삶을 향한 충동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끝내 서로를 껴안는다. 타나토스와 에로스가 교차하는 순간에 인간의 불완전한 사랑은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타나토스와 에로스가 서로를 인정하는 순간에 인간과 인간은 불완전하나마 연결되어간다.
타나토스인가, 에로스인가?
죽음을 앞둔 유한한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가?
욕망이 나를 파괴하더라도 나아가는 끝에 놓인 것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삶에 끝에 작고 보잘 것 없는 내 앞에 또다른 작고 보잘 것 없는 누군가가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너와 내가 서로에게 중독이라서가 아니라, 나를 욕망하게 만들어 내가 우위에 선 관계에서가 아니라, 나의 이익을 위해 너의 이익에 기생하는 관계에서가 아니라. 그저 온전한 '나'와 '나'로 연결될 수 있기를, 이 영화의 끝에 작게 소망해본다.
2026.2.22
괜찮은 여성영화라는 생각.
- 공교롭게도 브리저튼 시즌4와 비슷한 시기에 영화를 봤는데 영화의 배경도 비슷한 19세기 초 영국인듯해서 브리저튼이랑 폭풍의언덕이 대비되게 다가온다. 한쪽은 햇살이 반짝이고 한쪽은 지옥을 헤매인다. 사랑도 한쪽은 (장벽은 있어도) 뽀송발랄한데 다른 쪽은 축축, x랄맞고; 한 쪽은 나의 heart를 움직이는 사람이고 다른 한 쪽은 나의 heart를 해부하고 파헤치고 들여다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둘을 교차해서 보는 게 재미가 있더라. 브리저튼이 천상계라면 폭풍의 언덕은 지옥의 브리저튼이고 폭풍의 언덕에 안개가 끼고 폭풍이 친다면 브리저튼은 햇살 낭낭하게 비치는 들판이다. 두 영화가 인사이드아웃에 나온다면 기쁨이들의 사랑과 불안이들의 사랑일 것 같다.
- 제이콥앨로디의 연기를 처음봤는데 눈이 정말 순하게 생겼더라. 소설 속 히스클리프는 고독한 한마리 늑대같은데 제이콥앨로디의 히스클리프는 세인트버나드 같았다. 그래서 외려 선악의 구도에서 영화를 보게 되지 않고 관계의 역학구도의 전복으로 영화를 보게된다. 에드거와 선악으로 대립하는 히스클리프가 아닌, 캐시와 관계의 우위가 역동적으로 바뀌는 히스클리프다. 캐시의 사랑을 바랄 때는 순한 강아지같고 캐시의 질투를 받고 의기양양할 때는 도베르만같다. 스스로 뚜벅뚜벅 걸어 서브미시브의 자리로 가는 이사벨라랑 균형이 맞는 것도 제이콥의 히스클리프가 귀를 내리고 '낑낑'거리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너무 강하기만 한 도미넌트는 폭력적인 가부장이랑 다를 게 없으니까.
- 여성의 성욕과 여성의 삶에 드리운 한계가 여러 상징과 피학/가학적인 성행위로 묘사되면서 남성 평론가들은 이 영화에서 '여성'을 쉽게 읽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원작이 워낙 유명했다보니 원작에 어떻게 BDSM을 묻힐 수 있냐며 분노하는 원작팬들도 전세계적으로 있더라. 여러모로 진입장벽이 있는 영화지만 영화의 연출방식에서 드러나는 감독의 의도는 분명히 여성의 삶을 향하고 있다. 성애장면에서 굳이 여성의 몸을 전시하지 않는 장면 연출이나 여성의 시선으로 전환된 카메라들, 에드거에 대한 묘사, 캐시아버지에 대한 묘사를 하녀들의 입을 통해 하는 것 등 많은 것이 그러하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이 영화가 영화<가여운 것들>의 대척점에 서있다고 생각한다.
- 돌비시네마와 색감과 음향 모두가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