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다닐때 모대의 학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네 학교에 밤에 술집다녀서 번 돈으로 명품 사서 들고 다니는 애들이 진짜 있어?"
그 학교의 학생들은 그 몇 해 전에 학교에 떼로 몰려와 여학생들을 때리고 밀치고 다니는 일을 '놀이'랍시고 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학교 앞 커피체인을 빌미로 우리 학교 아이들을 된장녀라고 부르고 성차별은 없다며 여성을 대상으로 물리적인 공격을 했다. 내가 1학년이 된 무렵에는 전략을 바꿔 우리학교 학생들을 밤에 술집다니는 창녀로 몰아가기로 했던 모양이다.
그 학생들의 자식들이 자라나 이십대가 될 무렵이 되니 이제 흔히 일베남 혹은 그 후예인 자들이 우리 학교 학생뿐 아니라 우리나라 여성 전체에 대고 같은 소리를 하는 세상을 마주하고 있다. 그들이 자라나면서 보아온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정에서의 역할이 그렇게나 소중한지, 결혼하지 않겠다며 그런 어머니의 역할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여자들을 무시하지 못해 안달이다. 결혼도 하고싶고 연애도 하고싶지만 여자들이 받아주지 않는다고 여자들을 길거리에서 죽이고 마트에서 죽이고 스토킹하다 죽이고 데이트하다 죽이고 결혼해서도 죽인다. 그러다가 제 손에 닿지 못하는 여자들은 창녀로 매도하고, (제눈엔 성공한) 결혼한 남자들을 '퐁퐁남'으로 몰아간다.
미국에서는 흑인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백인의 '계급지키기' 행위가,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을 대상으로 남성의 '가부장지키기' 행위로 치환된다. 미국에서는 백인의 (백년 전쯤 불법적으로 가졌던) 흑인보다 우월한 지위를 다시 돌려줄 것처럼 선언하고 그들의 표심을 이용하는 공화당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남성이 (가부장주의 시대에 가졌던) 여성보다 우월했던 지위를 마치 여성에게 '빼앗긴' 것처럼 조작하고 그들의 표와 일그러진 물리력을 이용하는 정당과 정치인이 있다.
사회에서 보장해준 지위를 제 본연의 것으로 알고 자라난 잠재적 기득권층이,
그 약속된 (줄 알았던) 지위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 느끼는 '허위의' 박탈감을
'정당한' 분노로 포장하는 무리들이 있다.
이들의 혐오와 차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자신의 권력과 로그롤링하는 정당과 정치인이 있다.
이 권력에 기생하며 돈을 벌고자
'정당화된' 혐오와 차별에 스피커를 대주는 언론이 있다.
진짜 기득권층은 기득권층(추구인)의 분노를 굴절시켜 약자를 향하게 함으로써 두 가지를 얻는다. 하나는 강력한 충성심이고 두번째는 기득권층을 향한 분노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이들은 분노의 방향을 틀어 자신의 정적에게 향하게 하고, 자신의 정적의 지지자를 공격하게 한다. 백인남성이 저소득층이 된 것은 사회 시스템의 문제와 불경기에 원인이 있을텐데, 그들의 분노가 사회나 정부를 향하는 대신 흑인을 향함으로써 기득권층은 흑인을 방패 삼아 -자신의 부와 권력으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빈부격차와 열악한 복지인프라를 유지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혼하지 못하고 안정적인 직장도 얻지 못한 남성들의 현재 지위는 몇십년동안 이어진 남아선호사상으로 성비가 불균형한 점, 불경기와 빈부격차가 커지는 경제정책의 시행에 기인한 바 크다. 하지만 '일간베스트'를 만들어 여성과 전라도로 시선을 돌리자 이명박정부는 정책실패와 국가의 부 빼돌리기로 인한 불경기에 대해 비판을 면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가 미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미국이 이민자를 '외부인' 취급하는 게 가능할 수는 있다면, 한국은 여성을 외부인이자 수단으로 취급함으로써 오히려 -그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성의 대가 끊길 위기로 돌아왔다는 점이겠다. 애초에 상대적으로 수도 적게 태어난 여성들이, 안전하게 자라나기도 힘든 세상이 되었고, 자라나며 엄마의 차별을 목격하고 사회의 차별을 목격한 끝에 결혼부터 거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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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이 계집신조라는 글을 외우고 다닌다는 기사를 보았다. 여자는 집에 있어야 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길에서 스마트폰으로 유투브를 보며 학원을 옮겨다니는 초등남학생들을 여럿보았다. 일베키즈가 자라나 약자를 공격하고 국회를 공격하고 사법권을 공격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유투브를 통해 자라나는 아이들을 교육한다. 그 아이들도 그대로 자라나서 또 세상을 공격하고 약자에 대한 테러를 자행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까? 이명박이 만든 프레임은 당시를 살아가던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칼이 되고, 나아가 이용하기 편한 새로운 극우주의자를 키워내고 있다.
기득권층이 만들어낸 허위의 박탈감과 가짜 분노가 실제의 박탈감과 진짜 분노의 자리를 빼앗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그들은 새로이 자라나는 어린이들과 함께 '정의가 무엇인지'의 관념을 뿌리부터 바꿀지도 모른다. 정상적인 논의가 '세명이 놓인 기찻길과 다섯명이 놓인 기찻길 중 어디를 선택해야 하는가'에 몰입해 있을 때, 그들이 주장하는 '우리가 가는 선로에 저들이 놓여있어 우리가 불편을 겪어야 한다면 저들 여덟은 모두 죽어 마땅하다'가 당연한 사회가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이대남'으로 통칭되는 극우화된 20대 남성의 주장에 정치가 포획되고 나아가 사회가 잡아먹힐 것을, 우리는 미리 의심하고 막아야 한다. '젊은 애들이 그러다 말겠지' 하다 지방법원이 공격을 당하고도 공격한 무리들이 기소중지 등으로 풀려나오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더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실제로 미국은 극우화된 백인남성집단에게 공화당이 포획되었고, 의사당이 공격당하고도 전대통령이 칭찬트윗을 날리고 해당 대통령이 끝내 재선에 성공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혐오와 차별로 무장한 미국의 극우집단이 어떻게 정치에 발을 들이고 세상을 그들의 입맛에 맞게 바꿔나가게 되었는지, 미국의 역사를 먼저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에는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 저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의 3장과 4장을 참고할 것이다. 이어 우리의 혐오정치가 어디쯤 왔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대남, 이준석, 이명박, 세 '이'가 만들고 드러낸 한국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자라나는 세대가 혐오정치의 기치를 당연하게 물려받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의 논의까지 나아가보고자 한다.
2025.7.7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