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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아 Feb 27. 2024

구부러진 채 여전히

영화 <프란시스 하>를 다시 보고 20대를 돌아보니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밤이었다. 다가올 출근과 거리두기를 하고 싶은 마음에 의미 없는 활자와 이미지들 사이를 유영하는 그런 밤. 그날도 어김없이 멍한 정신으로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서울극장이 사라진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마지막을 기념하는 굿바이 상영작에 <프란시스 하>가 있다는 것도. 서울극장에게 매달릴 만큼 절절한 추억은 없었지만, 어쩐지 이대로 헤어지면 안 될 거 같았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20대와의 이별로 향해가는 지금, 스크린으로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라니. 프란시스는 얼마나 변해있을까. 궁금했다.


흑백 화면을 통해 프란시스를 처음 만났던 건 이십 대 초반, 복학을 앞둔 휴학생 시절이었다. 인종도, 직업도, 심지어 살고 있는 차원도 달랐지만 나는 단숨에 알았다. 우리는 친구가 될 것이라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옛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가 뉴욕에서부터 모교 기숙사까지 밀려나는 동안 나 역시도 기숙사와 원룸텔, 자취방 따위를 옮겨 다니며 비슷한 시간을 겪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학을 졸업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녀를 다시 만났고, 나는 첫 만남에 느꼈던 친밀감 이상의 묵직한 동질감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의 나는 취준생이라는 실체 없는 타이틀을 단 채 면접만 봤다 하면 떨어지던 때였고, 일 년 남짓 만나오던 남자친구와는 허무하게 헤어졌으며, 만기를 앞두고 있던 LH가 빌려준 전세 대출금은 할머니가 땅을 가졌다는 이유로(할머니는 나의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연장에 실패해 집을 빼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도시가, 아니 이 사회가 자꾸만 나를 밀어내는 거 같아 자주 무력해졌다. 프란시스처럼 뭐 하나 마음처럼 되는 일이 없던 때였다. 그러니 직업도, 집도, 우정도 원치 않는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그녀에게서 동질감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밖에.


김혜리 기자는 저서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에서 프란시스에 대해 다소 신랄한 시선을 보낸다. 결국 원하던 무용수 대신 교수의 제안대로 안무가가 된 그녀가 처음으로 온전히 가지는 것은 '체념'이라고. 꿈꾸던 일 그 언저리에서 사회가 사 줄 용의가 있는 능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조촐한 유산자'가 되었다고 말이다. 만약 그녀와 두 번째 만났을 때 이 글을 읽었다면, 김혜리 기자의 시선에 공감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엔 나도 현실과 타협한 프란시스가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한 거라고. 마지막 그녀의 웃음엔 자조가 섞여있다고 느꼈으니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에게 20대는 자리를 점유하고자 하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때로 프란시스에게 남자친구보다 소중한 소피와의 관계처럼 견고한 우정을 구축하는 일이기도 했고, 그녀가 잘나가는 '정식' 무용수가 되고자 했던 것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그럴싸한' 직장을 구하는 일이기도 했으며, 뉴욕에 살고자 했던 그녀처럼 이 넓은 도시 한편에 작게나마 온전한 거처를 원하던 거주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그랬다면 프란시스와 나의 우정이 이토록 견고해질 수 없었을 테지), 애석하게도 결과마저 시원치 않다. 나 역시 원하던 일 그 언저리에 겨우 매달려 먹고살고 있다. 솔메이트 같은 우정은커녕, 빈틈없어 보이는 관계도 언제고 실바람 하나에 갈라질 수 있다는 사실만 배웠다. 어느 것 하나 내가 바라던 것은 아니었다. 나 역시 프란시스 할리데이라는 이름표를 접어 프란시스 하가 되기로 한 그녀처럼 부단히 구부러졌고, 마침내 타협했으며, 끝내는 접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9살에 다시 만난 프란시스의 마지막 웃음은 더 이상 자조적인 웃음이 아니었다. 분명 그녀가 꿈을 이루지 못한 줄 알았는데. 자꾸 밀려나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처음부터 꿈을 이루는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타협한 자의 비겁한 자기합리화라는 비판을 피해 갈 순 없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도 구부러진 채 여전히 살아가는데, 내 꿈도 좀 그러면 안 되는 건가.


그녀가 온전히 제 몫으로 만든 것을 굳이 꼽자면 '체념'이 아닌 '순응'이라 하면 어떨까. 체념은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함'을 뜻하지만, 순응은 '주어진 외부 조건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감각 작용이 변화하는 일'을 뜻한다. 그녀도, 그녀의 꿈도 단념한 것이 아니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 살아가고자 변한 것뿐이다. 자신의 이름표를 우편함에 맞게 접은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였다. 더 이상의 취준 기간을 거치기 싫어 적당한 회사에 취업하기로 선택한 게 나였던 것처럼. 그러니 언제고 접힌 이름표를 다시 필 수 있는 사람도 그녀일 것이다. 구부러졌을지라도, 여전히 살아가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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