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어떤 배우에게 빠졌다. 흔히 말하는 '덕통사고'였다. 실로 오랜만에 설렘을 느끼며 그에 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가 출연한 작품들과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다가, X(트위터)에 계정까지 만들었다. 아무래도 소식이 가장 빨리 올라오는 만큼 덕질에 특화된 플랫폼이니까.
그곳에서 그의 생일을 맞아 생일 카페, 소위 '생카'라는 것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런 것까지 가야 하나, 수십 번 고민했다. 결국 나를 움직인 건 어쩌면 그가 현장에 나타날지 모른다는 기대감이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보게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로 생카가 열리는 합정으로 향했다. 연예인에 빠져서 이런 짓까지 하고야 마는구나, 스스로를 조금은 한심하게 여기면서.
돌이켜보면, 나의 감정을 얕보는 건 오랜 습관이었다. 내겐 동생이 둘이고, 그중 한 명은 연년생이라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전부터 나는 집안의 첫째였다. 귀여움, 혹은 앙탈로는 동생들과 경쟁을 할 수 없다는 걸 일찍이 깨달았던지, 나는 어른스러움을 나의 전략으로 택했다.
대여섯 살 때였던 것 같다. 엄마 아빠와 장난감 가게에 갔다. 사준다고 한 적도 없는데 동생은 신이 나서 뛰어다니며 갖고 싶은 장난감을 골랐다. 나는 그런 동생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나까지 장난감을 사달라고 하면 엄마 아빠는 돈을 더 쓰겠지? 나는 장난감 필요 없어. 저렇게 유치하게 굴지 말자. 나는 언니니까, 뭐든 티 내지 않고 점잖아야 했다.
이런 나의 성향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 건 고3 때부터 대학 신입생 때까지 잠시 만났던 남자친구다. 지독한 연애였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처가 많다. 하루는 그와 한 음악 프로그램의 공개방송을 보러 갔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일을 드라마틱하게 각색해 몇 주 동안 게시판에 사연을 올린 끝에 당첨이 된 거였다.
알고 신청한 건 아니었는데, 운 좋게도 내가 학창 시절에 좋아하던 아이돌 그룹의 한 멤버가 나왔다. 나의 우상이었던 그의 실물을 처음으로 보고 기분이 좋아져, 그날의 공연을 신나게 즐겼다. 남자친구가 내게 사연을 써보라고 종용했던 일, 공개홀까지 먼 길을 가는 동안 다퉜던 일을 모두 잊게 하는 시간이었다.
공개방송이 끝나고,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당시 내가 살던 신촌으로 이동했다. 이상하게 내내 잠잠하던 그는 현대백화점 앞 빨간 잠망경 앞에서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아이돌 봐서 좋았냐고, 신났냐고 했다. 소리 지르는 거 다 봤다고. 놀리려고 농담처럼 꺼낸 말인 줄 알았는데 그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런 것 좀 하지 마, 존나 구려!"
평상시 같으면 상황을 무마하고 넘어가기 위해 미안하다고 했을 테지만 그때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황당하고 벙쪄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설마 진심으로 질투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즐거운 게 싫은가? 자기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서? 생각해 보면 수련회에서 신나게 집라인을 탔을 때도 그는 남들 앞에서 구리게 왜 소리를 지르냐고 폰을 집어던지며 화를 냈었다. 결국 그를 계속 만나다가는 내가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를 떠났다.
하지만 그 후에도 표현을 하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섣불리 감정을 내보였다가 평가당할 게 두려웠다. 감정을 드러내면 취약해진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많은 축제나 공연을 즐기는 데는 거리낌이 없었고 그런 데서 자유를 느꼈지만,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계속해서 그런 모습을 숨겼다. 콘서트도, 음악 페스티벌도 혼자 다녔다. 구려 보일까 두려웠다.
그런 내게, 처음 찾아간 생카는 충격적이었다. 배우를 좋아하는 마음에 그 공간을 찾아가면서도 스스로 조금은 구리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 채였다. 쭈뼛거리며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이내 압도당했다. 그곳은 좋아하는 마음이 구체적이고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노력으로 육화 된 공간이었다. 배우가 출연한 작품들의 온갖 굿즈부터 그가 실제로 입었던 의상들까지, 온통 그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운영진들은 밤새 공간을 꾸미느라 눈이 빨개진 채로도, 신이 나서 사람들에게 뭐 하나 더 설명해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부끄러웠다. 예전의 내 남자친구처럼, 누군가는 구리다고 비웃을지 모르는 사랑을 세상에 거리낌 없이 내보이는 그 진심이 나를 뾰족하게 찔렀다.
그때 생카에서 받아온 굿즈들은 내 다이어리 한 구석을 장식하고 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충격이 아직 생생하다. 배우에 대한 나의 마음이야 언젠가 바래서 즐거웠던 추억으로나 남겠지만, 그날 본 진심만큼은 꽤 오래 남을 것 같다. 나는 지금 구리게 연예인이나 좋아하고 있는 내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