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권태를 버티는 방법
신점을 봤다. 온라인으로 예약을 하면 직접 찾아가지 않고도 전화로 볼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해서 신청했다. 엄청난 고민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최근 들어 뭘 해도 재미가 없었을 뿐. 작은 거라도 좋으니 무슨 돌파구가 될 만한 힌트라도 찾고 싶었다.
"아이고, 언니야. 많이 답답했다, 그쵸?"
핸드폰 너머의 무당은 전화를 받자마자 공감의 말을 던지며 시작했다.
"작년까지 삼재였네. 알고 있죠? 많이 힘들었네. 고생했네."
내가 삼재였다고? 내가 그렇게 힘들었다고? 답답하긴 했는데 그 정도였나? 줄줄이 이어지는 공감의 말들에, 오히려 자기 객관화가 일어나며 약간의 반발심이 일었다.
"언니는 사무직이 안 맞다고 그래. 자유로운 영혼이라 혼자서 일해야 돼. 그리고 사람을 잘 보네. 말로 먹고살아야 되는데, 사무직 하고 있으니까 힘들지. 차라리 타로점 같은 거 배워서 사람들 상담해 주는 거 추천할게."
으잉? 생각지도 못한 솔루션이었다. 타로카드를 배우라는 말을 들으려고 이 복채를 냈나 싶어서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혼자서 계속 비슷한 말을 주워섬기던 무당은 또 다른 고민이 없느냐고 세 번 정도 묻더니, 내가 별 말이 없자 결국 예약된 시간을 20분 정도 남기고 상담을 종료했다. 전화가 끊긴 뒤 찾아온 정적 속에서 문득 깨달았다. 내가 정말 견디기 힘들었던 건 삼재 같은 운명이 아니라, 지독한 일상의 권태였다는 것을.
애초에 커다란 근심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신점을 예약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사람들은 보통 큰 사건을 겪고 나서 혹은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점을 본다. 그런 사람에겐 적당한 위로와 희망을 보여주고, 그가 내심 바라고 있을 선택지에 '신의 말씀'이라는 근거를 하나 얹어주면 될 것이다. 그런데 내게는 아무런 문제도, 힘든 의사결정을 할 일도 없었다. 일상의 권태, 단지 그것이 내 고민이었다.
실은 존재라는 권태로 그만 돌아버릴 지경이다. 이렇게 된 지가 꽤 되었다. 뫼르소는 태양빛에 눈이 부셔 결국 방아쇠를 당겼다지만, 내게는 그런 트리거도, 문자 그대로의 트리거도 없다.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하거나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아주 건전하고 조금 뻔하게, 콘텐츠로 도피한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 2025년 한 해에는 영화를 134편 보고 책을 132권 완독 했다.
이 시도는 대체로 성공적이다. 좋은 이야기는 언제나 넘쳐나고, 영화관에 가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의 경험을 수반하기에 거기서 파생되는 재미도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남이 만든 이야기로 회피할 수 있을까. 영화관에 앉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 경험, 책 속에서 낯선 나라의 이야기를 읽는 경험, 이 모든 것이 나의 삶임을 물론 안다. 하지만 때로는 무언가 좀 더 생산적인 활동으로, 내가 직접 시간을 채워가는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든다.
우연히 주어진 생이라는 사건에 꼭 그럴듯한 의미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너무 괴롭기 때문에 나는 늘 이 주문을 만트라처럼 외곤 하는데, 그러면서도 늘 무언가를 막연히 기대한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나마 덜 지루하게 버틸 수 있을까 고민한다. 생계유지를 위해 하는 활동이 나에게 보람과 의미까지 주면 더 바랄 게 없겠으나, 안타깝게도 그런 행운은 내게 오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생계유지 활동이 나의 시간을 온전히 빼앗아 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열심히 번 돈으로 오늘도 나는 영화를 보러 간다. 그러면서 불쑥불쑥 튀어 오르는 의미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한번 파묻어 본다. 다만 오늘의 영화가 재미있기를, 그래서 의미에 대한 생각 따위는 잊고 작품의 여운 속에서 행복하게 잠들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주말엔 동료에게 빌린 타로 카드 책을 읽어야지. 조금은 황당한 처방전이지만, 적어도 내 일요일의 권태 정도는 지워줄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