앰버 이야기
원래 생리기간에는 가능한 아무것도 안 한다. 출퇴근을 제외한 거의 모든 스케줄을 미루고, 생리휴가를 사용해 집에서 쉬는 편이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듯이, 나의 이 패턴 역시 종종 어긋나곤 한다.
그 날은 조금 더웠다. 생리 3일 차였고, 퇴근을 2시간쯤 앞둔 시점이었다.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 일해?
- ㅇㅇ
- 저녁에 뭐해
- 집 가서 디비 잘 것
- 밥먹자
- 안 될 듯
- 훠궈 먹자
- 7시에 강남역에서 봐
- ㅋㅋㅋㅋㅋㅋ
- ㅇㅋ
원래 자극적인 음식에 끌리는데, 생리 중엔 더 그렇다. 그런 내게 ‘훠궈’라는 카드를 내미는 친구의 연락은 거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진통제를 먹은 덕에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고, 마침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퇴근까지 남은 2시간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생겼다.
퇴근 시간을 30분쯤 앞두고, 갑자기 처리해야 할 업무가 생겼다. 친구에게 약속을 늦추자, 미안하다 연락을 해 두고 빛의 속도로 끝냈다. 하지만 결국 40분 정도 늦게 퇴근하게 되었다.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후다닥 달려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강남역에 도착해 친구와 함께 훠궈집에 갔다. 근황은 뒤로 미루고 일단 저녁부터 해치웠다. 야무진 한 끼를 먹고 나니 어느새 9시가 넘었다. 귀가하기로 했다. 우리 집은 강남역에서 1시간 하고도 30분은 더 가야 한다. 진통제의 효과가 점점 떨어지는지 몸이 아파왔고, 대중교통을 갈아타고 달려갈 생각을 하니 앞이 깜깜했다. 30초 정도 고민을 해 봤다.
- 야… 나 택시 탈까?
- 돈 많니?
- 뭔 소리야, 개털이지. 근데 너무 힘들어… 나 오늘 너무 고생함.
- 왜.
- 나 생리함.
- 타라. 내가 택시비는 못 줘도 용기는 준다.
- 오케이. 다음에 봐.
- 어어. 잘 가라~
택시 정류장 앞에 선 우리는 다음을 기약했고, 나는 용기 내어 택시에 올랐다(사실 용기가 잘 안 났다. 개털에게 5만 원 돈은… 아주 거금이니까…). 기사님께 목적지를 말씀드리고 안전벨트를 매니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 오늘 재밌었당ㅋㅋ
- 00아 0000
- 택시 번호 보고 타지 왜 그냥 탔냐
그러게, 생각하며 택시 번호를 복사해 동생에게 보냈다. 기사님의 '출발합니다~'하는 말씀과 함께 택시가 출발했다. 강남 외곽으로 갈 때까지만 해도 '아, 이게 돈이구나. 자본의 힘이구나. 편안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운전자가 택시 앞으로 끼어들자 기사님께서는 '저, 저 XX놈… 운전을 X같이 하네…' 연신 욕설을 내뱉으셨다. 갑자기… 왜 역정을 내세요… 여기… 사람 있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저… 고객인데요… 밀폐된 공간에 중년 남성과 둘이 있고, 운전대는 그가 쥐고 있으며, 그는 별안간 화를 낸다. 슬슬 긴장되기 시작했다. 동생에게 '시간 되면 전화 좀 해 줘 봐' 하고 카톡을 보냈다. 위장에서 훠궈가 춤을 췄다. 그런데…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그럴 수 있지.' 하고 생각했다. 침착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세 차례나 들렸다. 청천벽력 같았다. 그때부터는 '멘붕'이었다. 뭐? 왜? 왜 경로를? 이탈해? 세 번이나? 네비를 켜고 가는데 왜 이탈해?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물론 무서운 쪽으로. 속이 안 좋았다. 요즘 안 그래도 위가 아팠는데, 정말 울렁거리기 시작했고, 약효가 떨어진 덕에 생리통도 다시금 찾아왔다.
그러던 찰나 동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택시 타고 가고 있다, 어디 방면이다, 탄지 20분쯤 됐으니 30분 안에 도착할 것 같다, 이 정도로 통화를 마치고 조용히 지도 앱을 켰다. 현 위치에서 집까지 검색해 보니 다행히 잘 가고 있었다. 마음은 편해졌으나, 한 번 안 좋아진 속은 계속해서 아파왔다.
침착한 표정을 애써 유지한 채로 동네에 도착했다. 카드 한 번 긁자 눈 깜짝할 사이에 41,500원이 사라졌다.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건네고 내렸다. 밤공기를 맞으니 조금 나아졌다.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오늘 얻은 게 뭔지, 잃은 게 뭔지 생각했다.
얻은 것 : 다리의 편안함, 긴장감, 불안감, 위 통증, 울렁거림
잃은 것 : 41,500원, 마음의 편안함
억울했다. 생리 중이니 편하자고 탄 택시인데 다리의 편안함(그마저도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외에 내가 얻은 것 중 내게 도움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헛돈 썼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그냥 하나 배웠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할 거라는 판단이 섰다.
이렇게 사소한 일에서 느꼈다는 게 웃기지만, 나의 아래 세대는 조금 더 마음 놓고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 세대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열심히 하고 싶다. 이 날은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도 중구난방인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P.S. 결국 집에 도착해서 먹은 거 다 토했다. 하나 배운 것 치고 대가가 혹독하다.
- 앰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