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해방

앰버 이야기

by 오늘

취미에 대해 이야기 나눌 때 많은 사람들이 영화 감상을 꼽을 거라 감히 예상해 본다. 나도 그렇게 말해서 많은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은데 나는 거짓말로라도 ‘영화감상을 즐겨요.’라고 말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첫 번째로 한 시간 반 이상을 얌전히 앉아서 간식거리를 씹으며 영상물에 집중하는 행위에 매력을 느끼는 편이 아니다(이렇게 말하지만 막상 재미있으면 잘 봄). 두 번째로 크고 작은 논란이 있는 배우들의 작품을 대충(열심히는 아니다. 정말 정말 꼭 보고 싶으면 흐린 눈으로 보긴 한다.) 피하려다 보니 볼 게 딱히 없기도 하다.


이런 사람이 며칠 전 집 근처 영화관에 가서 <버즈 오브 프레이(할리퀸의 황홀한 해방)>를 봤다. DC코믹스의 이전 영화는 본 기억이 없다. 그 유명한 히스 레저의 조커도 안 봤고, 배트맨 시리즈에 누가 나오는지도 모르며, 작년에 개봉한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당연히 안 봤다. 그런데 이번 건 입소문이 좋아 보기로 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 이후 핼러윈의 번화가에만 가면 과장 좀 보태 50m에 한 명씩 있는 푸르고 붉고 창백하고 추워 보이는 할리퀸이 조커의 연인이자 대중의 아이캔디로 소비되는 그 할리퀸이 꽤나 많이 달라졌다는 말에 혹해 영화관에 가기로 한 거다.


5점 만점에 4점 이상을 주고 싶다. 일단 내가 DC 세계관을 잘 모르는 걸 감안했을 때 아주 친절한 영화다. 할리퀸의 설명을 통해 배경지식이 0에 수렴하는 나 같은 사람이 보더라도 거의 모든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액션 신이 장난 아니다. 때리고, 패고, 죽이고, 부수고, 총을 쏘고, 배트를 휘두르는 할리퀸이 내 속을 뻥 뚫어 놓는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말 그대로 ‘황홀한 해방’이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할리퀸 외에 기억에 남는 건 역시 블랙 카나리. 그는 할리퀸과 함께 가장 가시적인(또한 부제에 걸맞은) ‘황홀한 해방’을 맞는다.


(지금부터 스포일러 있음)


이전의 할리퀸은 조커에게 묶여 있었다. <버즈 오브 프레이> 초반의 할리퀸은 결별을 통해 조커의 가스라이팅에서 자유로워지는 동시에 조커의 보호 밖의 존재가 된다. 작중 할리퀸 역시 빌런이었으므로 당연하게도 조커의 연인이라는 허상의 권력을 잃은 할리퀸을 노리는 자들이 사방 천지에 널려 있다.


블랙 카나리는 로만에게 묶여 있었다. 사람을 죽이고 얼굴 가죽을 벗기는 비도덕적인 취미를 가진 로만의 클럽에서 노래하며 살던 그는 인신매매를 당할 위기에 처한 할리퀸을 구해낸다. 그리고 그 짧은 격투 장면을 목격한 로만에 의해 로만의 운전사로 승진(?)하게 된다. 본래 도덕적인 심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블랙 카나리는 그렇게 로만에게 귀속된 삶을 산다.


너무 큰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자세히 서술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이들은 다른 여성들과 손을 잡고 각자를 옥죄던 것들을 부순다. 블랙 카나리는 로만의 그늘에서, 할리퀸은 ‘조커가 없으면 별 볼 일 없는 존재’라는 오명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할리퀸, 블랙 카나리, 헌트리스, 르네 몬토야. 이 넷이 합심해 로만과 재즈 패거리를 해치운 이유는, 별 거 없다. 카산드라 케인이 죽지 않게 하기 위해. 사실상 할리퀸은 빌런, 헌트리스는 연쇄살인범(감정적으로 타당하게 느껴지는 동기가 있긴 함)인데도 카산드라를 살리기 위해 더 악한 무리를 쓸어버린다. 이유는, 다시 말하지만 별 거 없다. 나쁘지만 그 정도로 나쁘지는 않으니까. 난 이게 너무 좋다. 약자에게 연대하고 강자에게 대항하는 빌런들이라니. 이것만으로도 너무나 매력적이다.


의상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할리퀸은 보기만 해도 불편하고 갑갑할 정도로 꽉 끼는, 짧은 옷차림을 하고 있다. 정말이지 ‘예쁜’ 것 외엔 아무 쓸모도 없는, 질염 걸리기 딱 좋은 옷이다. 통풍 안 되고, 딱 붙고, 밑위 짧고. 게다가 트레일러 영상만 봐도 그냥 돌아다니는 ‘짤’만 봐도 그를 담는 카메라의 시선은 지독히도 의도된 성적 함의를 가졌다. ‘아름다운’ 여성 캐릭터를 아이캔디 취급하며 ‘서비스 컷’을 넣는 관습이 이제는 지긋지긋할 정도다.


하지만 <버즈 오브 프레이>는 다르다. 등장인물들이 여전히 짧은 의상을 입기도 하지만, 확연히 다르다. 보다 여유로운 핏의 데님 반바지와 그보다 더 편안해 보이는 긴 바지도 입는다. 환복 장면과 대상화 가득한 앵글, 불필요한 클로즈업은 없다. 알록달록한 색감의 의상을 입은 할리퀸의 시원스러운 웃음과 액션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이러니까 신선한 거다. 특별할 것 없는 오락영화에, 개연성이 부족하고, 캐릭터 비중의 균형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앵글과 주체와 객체가 달라지니까. 크게 머리 쓸 필요도 없이 그냥 뒤집기만 했을 뿐인데도 신선하다는 거다.


더 바랄 게 있다면, 셀링 포인트를 ‘여성 서사’로 잡은 영화들이 퀄리티에 지금보다 조금은 더 신경 썼으면 한다. 물론 아직 여성 서사 발전의 초창기니까, 극장가에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는 영화들이 아직도 걸려 있으니까. ‘여성 서사’라는 이유만으로 보는 관객들이 많으니까 일단은 양적으로 많은 영화들이 등장할 시기인 건 알지만, ‘여성 서사’ 영화들이 더 많은 호응을 얻다 보면 퀄리티에 대한 갈증도 반영되고, ‘더 좋은’, ‘더 잘 만든’, ‘더 세련된’, ‘질적으로도 훌륭한’ 작품들이 계속해서 나오리라 믿는다.


이렇게 마친다. 어찌 됐든 지금 상황에서 <버즈 오브 프레이>는 오아시스까진 못 되더라도 시원한 물 한 컵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추천!


- 앰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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