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누르기엔 고결하고, 굽히기엔 드높은

앰버 이야기

by 오늘

영화 보는 취미가 없다고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는데 또 보고 왔다. 근래 들어 여성 서사 영화가 많이 개봉했으니 대세를 따라 취미 하나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어린이를 위한 고전’ 같은 느낌의 이름을 가진 전집에서 읽은 원작을 떠올렸다. 네 자매가 나오는 소설이라는 것 외에는 딱히 기억나는 게 없었다. 꽤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은데도 왠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감상평이 대체로 좋기에 기대감을 가지고 <작은 아씨들>을 보러 가기로 했다.


티켓팅을 하고 팝콘과 음료를 사 들고 입장했다. 캐러멜 맛 팝콘 덕에 혀가 아려 올 때쯤 시작된 영화는 생각보다 긴 러닝타임에 지쳐 몸을 뒤틀 때쯤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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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음)

일단 나는 메릴 스트립이 나오는 영화에서 마케팅을 진행하며 티모시 샬라메를 내세운다는 사실에 분노했던 사람이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반성했다. 메릴 스트립의 비중이 크지 않다. 아무리 대배우라도 전면에 내세워 마케팅 하기에는 분량이 너무 적다. 양심상 그랬으리라 선해해 본다.


시얼샤 로넌이나 플로렌스 퓨, 티모시 샬라메 등의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그 기대는 충분히 채워졌다. 게다가 배경이 배경이니만큼 의상이나 소품 등을 보는 재미가 있고, 시점의 변화에 따라 조명과 색감을 다르게 사용하는 기법은 ‘아, 이게 영상예술이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그리고 다 떠나서, 여러 명의 여성들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만으로도 아주 즐겁다.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는지 몰라도, 개인적으로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볼’ 영화는 아니었다. 영화 관람 전 읽은 것 중, ‘시대의 변화가 충분히 반영되어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줌(정확 치는 않으나 대충 이런 식의 평이었음)’이라는 평이 내 기대에 불을 지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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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원작(1868년작이니, 고전이다)의 한계겠지 싶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2020년에 개봉하는 영화인데, 적어도 조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줄 알았다. 가난한 가정교사 브룩과 결혼한 메그, 조를 사랑했던 로리와 결혼한 에이미. 그 사이에서 적어도 조만은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고, 그러길 바랐다. 배우가 되는 대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메그와 오랜 짝사랑 끝에 로리와 결혼한 에이미의 선택이, 그들이 꾸었던 꿈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메그가 그랬듯, ‘나의 꿈과 너의 꿈이 다르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모두가 같은 꿈을 꿀 순 없다. 당연하게도 살아온 맥락과 환경에 따라 다른 꿈을 꿀 수밖에 없다.


다만, 아주 개인적인 아쉬움이다. 미디어에서 다양한 여성상을 보여주길 바라는 사람으로서 조가 자신의 일과 커리어에 집중한 삶을 살아갔으면 했다. 외로움에 고뇌하고, 사랑인지 아닌지 모를 감정에 혼란을 겪더라도 결국은 사랑이 아닌 커리어를 택하는 인물이길 바랐던 거다. 물론 조가 결혼을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가 일과 커리어를 포기한 것도 아니다. 사실상 일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걸로 해석된다. 재차 말하지만 그냥, 개인적으로 아쉬운 거다. 누군가와 결혼하지 않고,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홀로(또는 자매들과 함께) 걷는 여성 캐릭터가 고전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주인공으로 나온다면 얼마나 신날까 생각했는데 그 기대가 완전히 깨졌으니까. 결국, 사랑하지 않는 선택지는 가볍게 사라졌으니까 말이다.


깨진 기대와 별개로, 조를 통해 본 외로움에 대한 고뇌는 몹시 좋았다. 외로움이란 유성애와 별개로, 사회적 동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느끼는 거라고 생각한다(물론 그 장면의 조는 로리에 대한 애정을 깨달은 것처럼 그려졌다.). 그걸 시얼샤 로넌이 조라는 캐릭터를 통해 너무나 잘 표현했다. 깊게 공감할 수 있었다. 네 자매의 엄마가 외로움을 호소하는 조를 감싸 위로를 건네는 장면은 일종의 연대로 다가오기도 했다.


이 외에도 로리와 에이미의 결혼, 베스의 죽음, 메그의 가난 등…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지만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부분을 끝으로 이번 글을 마친다.


‘시대의 변화가 반영된 고전 영화’를 기대하면 실망이 클 수 있다. 어디까지나 고전인 점을 감안하고, 변화에 대한 기대치를 낮춘다면 아주 훌륭한 작품일 거라 생각한다. 고전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스토리를 제외하면 딱히 흠잡을 거리가 없었다. 모녀간, 또는 자매간에 함께 보러 가기 좋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평화롭고 잔잔한 영화를 원하는 분께 추천한다.


- 앰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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