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대화' 체험에 대한 기억
눈앞에 어지러이 무언가가 떠다닌다. 옅고 검은, 크고 작은 덩어리들이. 밝은 빛 앞에 있을 때 더 활발하게 움직인다. 안과를 찾았더니 ‘비문증’이라고 한다. 비문증은 자연스럽게 없어질 수도 있어서 특별한 치료법이 없다고 의사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 태도가 불쾌하기도,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것보다 문제는 얇아진 망막이 떨어지지 않도록 레이저 시술을 해야 한다는 진단이었다. 의사는 그 진단도 별 일 아닌 듯 말했고, 나도 그 예방적 시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망막 열공 레이저 시술을 받고 나서 눈앞이 뿌연 상태로 몇 시간을 보낸 이후에야 불안이 느껴졌다. 괜한 짓을 한 걸까. 모든 것은 그 의사의 심드렁한 말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없이 약한 눈. 작은 먼지만 들어가도 따가워서 눈물을 줄줄 흘리는 여린 눈. 한 번씩 침침하고 불편한 느낌이 들면 그제야 겁이 덜컥 나는 나의 소중한 눈.
의사에게 눈이 침침한 것 같다고 말하니, ‘침침하다’는 명확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타박한다. 건조한 건지, 시력이 떨어진 건지, 아픈 건지, 정확하게 말하라고. 그런데 내 증상을 ‘침침하다’ 이외에 달리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렇게 심하게 건조한 것도, 안 보이는 것도 아니지만, 그저 침침한 느낌. 눈에 대한 갑작스러운 걱정이 시작됐다. 보이지 않는 건 어떤 것일까.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중학교 때 봉사활동 교육에 가서 시각 장애인 체험을 한 이후였을까. 눈을 가리고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데, 그때 느꼈던 공포가 기억난다. 온 힘을 다해 안대 사이를 비집고 무엇인가를 보려 애쓰며, 어떻게든 내가 안전한지 확인하려 했다. 내 팔을 잡고 있는 누군가를 전적으로 의지할 수 없었다. 안전함을 알고 있음에도 마치 그곳이 낭떠러지인 듯 무서워했다.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달랐다.
처음 동화 쓰기를 공부할 때, 보이지 않는 아이에 대해 동화를 썼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아이가 숲 속에서 길을 잃는 이야기였는데 같이 수업을 듣던 누군가 내게 ‘어둠 속의 대화(Dialogue in the Dark)’ 체험을 해보라는 추천을 해주었다. ‘어둠 속의 대화’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전 세계에서 사랑받고 있는 체험 프로그램이다. 빛이 한 줌도 없는 완벽하게 어두운 공간에서, 시각장애인의 안내를 받아 마치 여행을 하듯 여러 공간을 체험하고 다시 빛의 세계로 돌아오는 경험을 하게 한다.
3년 전쯤 내가 담임을 맡았던 반 아이들 세명과 함께 그 체험을 위해 북촌을 찾았다. 시간이 꽤 지나 구체적으로 기억나진 않지만 몇몇 인상적인 장면이 남아있다. 가장 놀랐던 것은, 내가 생각보다 완벽한 암흑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무언가를 보려 애써도 빛이 한 줌도 없는 공간에서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 가려져 있지 않았음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낯선 경험이었다. 일상에서는 거의 언제나, 어딘가에서 비집고 들어오는 아주 작은 빛을 가지고 무언가를 식별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어둡다는 것은 빛이 적다는 의미였다. 완벽한 암흑은 경험하기 쉽지 않다.
그 완벽한 암흑은 다른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서로 모르는 10명 정도의 사람들이 그 어둠의 공간 안에 들어서서 한 줄로 선다. 앞 뒤 서로의 존재를 청각, 촉각으로 인식한다. 귀와 손 끝으로 느껴지는 정보에 의지하며, 집중하며, 한 걸음씩 발을 내디뎠다. 우리를 안내하는 목소리가 그곳에 있다. 그는 시각장애인이었고, 어둠 속에서 우리보다 편안하게 사물과, 사람과, 상황을 파악하며 우리를 이끌었다.
“거기 있지?” “잘 오고 있어?”라고 확인하며 손을 더듬거렸다. 내 뒤 아이의 가늘고 차가운 손에 닿았다. 그 촉감은 지금까지도 매우 선명하다. 길은 구불구불, 높낮이를 달리하고 있어 벽을 따라 아주 조심스럽게 걷다 보면 앞에서, 뒤에서 부딪히기도 한다. 불안함을 느끼며, 온몸에 힘이 가득 준 채 나는 끊임없이 이 공간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애를 썼다. 그곳이 안전한 체험 공간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는 것은 별개였다.
배를 타는 곳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곳의 실재를 알지 못한다. 그날 내가 경험한 그곳엔 분명 물이 흐르고 배가 떠있었다. 배를 탄 듯한 물의 꿀렁거림과 물이 철썩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물이 그곳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또 다른 공포였는데, 문득 그 모든 것들이 꾸며진 것이어서 그 꿀렁거림과 소리, 냄새 같은 것들은 가짜가 아닐까 생각했다. 충분히 어떤 기계 장치들로 흉내 낼 수 있지 않을까 의심하다 보면,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게 돼버렸다.
마지막으로 안내자는 우리를 어느 레스토랑으로 이끌어 새로운 목소리를 만나게 한다. 그곳에서 새로운 목소리는 우리에게 음료를 대접하고, 우리는 콜라와 사이다의 맛을 구분하지도 못한 채 마셨다. 보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을 인식함에 있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혹은 시각으로 정보를 받아들여도 우리는 결국 완전히 인식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빛을 향해 걸어 나왔을 때, 나는 크게 안도했다. 나는 얼마나 많은 부분을 시각에 의지하고 있는가.
얼마 전 읽은 이슬아의 책 ‘갈등하는 눈동자’에서 읽은 시각장애인 김성은 작가의 인터뷰가 정말 좋았다. 읽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지점이 있었다. 그녀는 글을 읽는 사람이었고,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더 오래 걸리더라도, 더 힘들더라도, 그녀는 방법을 찾았다. 맹인에게 정보는 귀 아니면 손이라 말하는 그녀에게 작가로서 보이지 않는다는 건 큰 장애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할 수 없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어떤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있는지 생각하며 '어둠 속의 대화'가 떠올랐다. 잠깐의 체험을 가지고 안다고 말할 수 없지만, 보이지 않는 경험은 불안했고, 두려웠다. 자신의 삶에 대해 덤덤하게 말하는 그녀가 그래서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장애에 매몰되어 상처 내고 밀어냈던 스스로에게 미안해서라도 오롯이 사랑하겠습니다. 기필코 사랑에 매진해 보겠습니다.'라고. 그녀의 오랜 친구 김혜영은 낭독회에서 이런 편지를 전했다. '성은아. 가끔 네가 그러잖아. 온전한 하나이고 싶다고. 너 자신이 절반인 것 같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을 쓸모로 따지지 않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감각으로 세상을 온전히 부딪히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보인다는 건 내게 당연했던 세계이나, 하나도 당연하지 않은 세계였고, 그 세계는 보임으로써 많은 것을 내게 전달하고 있으나, 그것들로 내가 세계를 다 이해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감각으로 각자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한 세상을 이해하고, 그것에는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모두의 감각이 가진 한계로 인해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서로 덜어내줄 수 있도록 공감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청각과 촉각으로 세계를 받아들여 기필코 사랑에 매진하는 김성은 작가의 책을 통해 나는 또 어떠한 세상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눈앞에 검은 덩어리들이 사라졌다. 언젠가 또 나타나 둥둥 떠돌 것이다. 나의 물리적 눈은 지금도 어떤 것들을 받아들여 감각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 눈이 책을 읽어 글을 받아들이고 공감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했으니, 나는 아주 조금 더 세계를 이해하는데 한걸음 나아간 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