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모르는 비밀을 가져야겠다.
입사 4년 차가 된 어느 날 베로니카는 아니지만 아무튼 그런 결심을 했다. 회사가 모르는 비밀을 가져야겠다고.
회사일은 능숙해졌고 팀 분위기도 좋아 사람 스트레스도 없었다. 능력과 요령을 터득하자 일과 사람 모두 어느 정도 눈에 들어왔고 이는 심적 물리적 여유로 돌아왔다. 인터넷 쇼핑을 해도 포털 뉴스를 몇 바퀴 돌아도 업무 진행엔 아무런 지장이 없었고 그때부터 난 급격하게 나태해지고 게을러졌다. 회사에 쏟는 에너지가 줄어들면 그만큼이 삶의 에너지로 전이되어야 할 텐데 늘어난 건 마시는 술병들 뿐, 마치 에너지 총량이 줄어든 양 오히려 무기력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몇 번이고 이런 식으로 일하면 안 되지라고 마음을 다잡고 일에 집중해 보았지만 그게 그리 쉽게 되나... 아무런 열정도 활력도 없는 상태가 꽤 오래 지속된 옅은 불안감에 시달리던 그때 불현듯 결심했다. 회사가 모르는 비밀을 가져야겠다고.
난 취미랄 게 없다. 그저 여느 남자들처럼 술을 좋아하고 야구와 축구 보는 것을 좋아한다. 영화 보고 리뷰 읽는 것도 좋아하고 음악들도 찾아 듣는 편이다. 모두 새로울 것도, 남다를 것도 없는 비밀이 될 수 없는 것들이다. 난 참 색깔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자조 속에 회사와 집만을 오가는 역시 색깔 없는 일상이 반복되던 중 난 회사가 모르는 두 가지 비밀을 가지기로 했다.
첫 번째 비밀은 기타였다.
기타는 오랫동안 나의 로망이었다. 델리스파이스를 좋아했던 난 챠우챠우를 들을 때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상상을 하곤 했다. 학창시절 배울 기회가 있었지만 왼손잡이라 어려울 거란 마음에 지레 겁먹고 망설였고 결국 성인이 될 때까지도 기타는 전혀 쳐보지 못했다. 이번 엔야 말로 기타를 배워보기로 했다. 무작정 입문용 기타를 질렀고 독학은 동기부여가 안될 것임을 알았기에 학원과 동호회를 검색했다. 학원은 완전 초보인 내가 다니기엔 수강료가 부담스러웠고 동호회는 낯선 사람들을 대면한다는 게 불편했다. 고심 끝에 학원과 동호회의 중간적인 성격을 지난 곳을 찾았고 그곳에서 난 3개월간 기타를 배웠다.
꽤 즐거운 시간이었다. 칼퇴 뒤 뛰어가 강습을 듣고 치맥을 하며 기타 반주에 노래를 불렀던 날들이다. 운지 손가락의 고통이 익숙해졌고 손끝 굳은살이 훈장처럼 박였다. 기본 코드는 느릿느릿 따라 치게 되었고 강습을 마친 뒤 강사가 주도하는 뒤풀이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얼기설기 밴드 합주도 몇 번 해보았다.
그래도 동호회적인 친목 개념이 있었기에 계속되는 낯섦과 대상포진으로 인한 통증으로 석 달만 하고 그만두어야 했지만 그 기간은 꽤나 짜릿한 순간으로 남아있다. 아마도 올해 중으로 다시 등록해서 본격적으로 기타 연습에 매달리지 않을까? 에프 코드를 자연스레 이어갈 수 있는 순간 회사에 비밀을 털어놓을지도 모르겠다. 취미가 기타라고.
두 번째 비밀은 글쓰기였다.
글쓰기는 오랫동안 나의 욕망이었다. 난 기본적으로 글쟁이들에게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매번 혼자서 생각을 정리해 끄적거리다 창피함에 접기를 여러 번, 이번엔 그 욕망을 제대로 실현해 보고 싶었다. 유명 평론가가 진행하는 대중문화 글쓰기 강의를 신청했고 총 5주간 4번의 글쓰기와 수강생들과 서로 합평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리뷰를 써보고 그걸 전문가의 합평을 들어본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멋진 일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평론가가 내 글을 칭찬해 주다니!
그러고 보니 난 내가 쓴 글을 누구한테 보여준 적이 없었다. 내면을 들키는 기분이 마치 발가벗겨진 느낌이 들어 매번 도망치기만 하다 처음으로 광장으로 나선 것이다. 다행히도 내 글이 광장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언어로 글로 세계를 설명하고 싶단 내 욕망이 얼마나 진한 것인지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의 브런치 글쓰기도 그 욕망을 이어나가는 도중이겠지. 이 비밀은 과연 언제쯤 털어놓게 될까? 글쎄 쉬워 보이진 않는다.
두 비밀은 회사에 그 누구도 모른다. 아니 내 주변에 거의 다 모른다. 아무도 궁금해하지도 않겠지만...어쨌건 나만의 비밀이었고 이 비밀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비밀이 없었다면 2015년이 얼마나 재미없던 해로 남았을까? 강습이나 수업이 있는 날이면 들뜬 마음에 회사가 지루하지 않았다. 아마도 남들이 보기에 내 얼굴은 미소 짓고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다른 세계(비밀)를 갖는다는 건 오히려 지금의 세계(회사)에 충실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 같다. 경계에서 꽃이 피듯 두 세계의 긴장이 나를 풍부하게 만든다고나 할까? 김태원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남자는 아니 사람은 비밀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매력적인 사람이 된다. 새해가 닷새 지난 올해에도 다짐한다. 2016년에도 나만의 비밀을 가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