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색가의 뇌, 현대 도시에서 끊임없이 지치는 이유

얇은 필터가 만든 과부하의 비밀

by 수플레네

"왜 그렇게 멍 때려?"

"몇 번을 말했는데 못 알아듣겠어?"

"집중하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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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이런 말들을 많이 들어왔던 것 같다.




이것은 ADHD,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흔히 겪는 일이다.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보다 멍 때림이나 주의력 결핍이 더 두드러지는 유형이었다. 이 모든 특성은 오랜 시간 '단점'과 '질병'으로만 취급되어 왔다.


하지만 나는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정말 이 모든 것을 단점으로만 볼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 특성을 가진 사람들은 진화 과정에서 도태되어 이렇게 많은 인구로 남지 못했어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WHO(세계보건기구)가 제시한 진단 기준에 의거한 다양한 연구에 따르면, ADHD는 전 세계 소아·청소년 인구의 5~8%가 겪는 것으로 추정된다.


혹시, 우리 뇌가 가진 이 특별한 작동 방식이 특정 시대나 환경에서는 매우 빛나는 '슈퍼파워'였던 적이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나는 이 모든 특성이 바로 ADHD 뇌가 가진 '얇은 필터'와 '하이퍼포커스'라는 고유한 작동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느꼈다. 바로 옛 선사시대의 사냥꾼이나 탐색가, 혹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신호를 감지해 도사처럼 여겨졌을 이들이 지녔을 법한 능력 말이다.


이 글은 그러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과연 선사시대의 '탐색가의 뇌'가 현대 도시에서 왜 이토록 지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깊이 탐색해보려고 한다.





얇은 필터, 생존의 무기에서
만성 피로의 원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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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HD 뇌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외부 자극을 거르는 필터가 유난히 얇다.


일반인의 뇌가 중요하지 않은 자극을 걸러내는 반면, ADHD 뇌는 미세한 소리, 빛, 시각적 자극까지도 여과 없이 받아들인다.



실제로 내가 카페에서 경험한 일이다.


어느 날 청각장애인 두 분이 수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손짓과 몸짓으로 대화하다 보니 중간중간 테이블을 치거나 손뼉을 치는 소리, 몸을 흔드는 움직임이 있었다. 나는 그분들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대화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일단 그 소리와 움직임이 인식되는 순간, 그것이 지나친 거슬림으로 다가왔다. 짜증이 커지고 그 자극에서 신경을 돌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나는 그 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카페를 떠났다.



카페나 공공장소에서 특정한 소리나 빛이 신경에 거슬리면, 그것에서 주의를 돌리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옆 테이블의 대화 소리, 에어컨 돌아가는 소음, 지나가는 사람의 발소리, 창밖 자동차 경적, 심지어 형광등의 미세한 떨림까지. 일반인에게는 '배경'으로 처리되는 자극들이 ADHD 뇌에는 동등한 강도로 쏟아져 들어온다.



이런 특성을 나는 '감각을 여는 힘'이 강한 뇌라고 표현하고 싶다. 문을 닫는 힘이 약한 게 아니라, 문을 여는 힘 자체가 너무 강한 것이다. 마치 볼륨 조절 장치가 항상 최대치로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에너지 소비의 비극



이 얇은 필터는 만성적인 피로를 유발하는 주범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가 10이라고 가정해 보자. 일반인의 뇌가 평소 3~5 정도의 낮은 에너지를 쓰는 데 반해, ADHD 뇌는 얇은 필터 때문에 7~9 정도의 높은 에너지를 주변 탐색에 상시적으로 소모한다. 항상 레드존에서 달리는 셈이다.



결과적으로 매일 '예비 에너지'가 고갈된 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게으름으로 오해받는 만성적 미루기의 근본 원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이 있다.


ADHD 뇌는 끊임없이 주변을 스캔하다가 생존에 중요한 신호나 강렬한 흥미에 꽂히는 순간 압도적으로 몰입하는 '하이퍼포커스'를 발동한다. 실제로 진화심리학에서는 이러한 특성이 수렵·채집 시대의 탐색적 행동과 창의성에 유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다.



에너지 총량의 개인차


물론 이 '에너지 총량'에는 개인차가 존재한다.


고지능이라 불리는 이들의 경우, ADHD 여부와 관계없이 일반인보다 잠재적인 인지 처리 능력 자체가 더 높을 수 있다. 같은 10이라는 에너지를 가졌다고 할 때, 일반인이 기본 능력치 5~6을 가진다면, 고지능인은 8~10의 능력치를 가진 셈이다.



특히 고지능 ADHD인의 경우, 이 '에너지 총량의 차이'가 장점과 단점을 극명하게 만든다.


일반적인 ADHD인보다 탐색 범위가 훨씬 넓고 하이퍼포커스 모드일 때 더욱 깊이 파고들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하지만 일상적인 에너지 소모량 역시 압도적으로 높아 만성 피로와 좌절감이 더욱 커지게 된다.



결국, 같은 잠재력이라도 에너지를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성취와 소진의 간극은 극단적으로 달라진다.






탐색가-관리자
공진화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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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에너지의 구조가 다르다면, 인류 사회는 서로 다른 두 뇌가 공존하며 균형을 맞춰왔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지점에서, ADHD와 일반인의 뇌가 서로를 보완하며 공진화(두 종류 이상의 생물이 상호작용하며 함께 진화하는 것)했다는 나의 깊은 고민이 담긴 '탐색가-관리자 공진화 모델'을 제시한다.



상상해 보자.


선사시대 부족 사회에서 ADHD 뇌를 가진 '탐색가'는 끊임없이 주변을 경계하며 새로운 사냥터, 위험 신호, 낯선 동물의 흔적을 발견한다. 탐색가는 끊임없이 주변을 스캔하며 위험 신호나 먹잇감의 흔적을 감지하는 '원재료 수집자'였다. 하지만 이 정보들은 정제되지 않은 상태다.



예를 들어, 탐색가가 "저 언덕 너머에서 이상한 연기가 보인다", "강 상류 쪽에서 큰 동물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 풀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식의 파편적인 정보를 가져온다.


그러면 일반인의 뇌를 가진 '관리자'는 그 원재료를 '활용 가능한 정보'로 가공한다. 우선순위를 정하고, 패턴을 찾고, 구체적인 행동 계획으로 만든다. "그럼 내일 아침 일찍 세 명이서 언덕 너머를 확인해보자", "강 상류는 위험하니 당분간 피하자", "이 풀은 독초일 수 있으니 표시해두자"는 식으로.



즉, 탐색가와 관리자는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며 함께 진화해 온 것이다.



사고 이탈도 탐색의 일부였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흔히 '집중력 문제'라고 여기는 사고 이탈 역시 사실 이 탐색 본능의 일부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나무 종류'를 찾다가 '나무열매'로 새고, 어느새 '사과'에 꽂혀 '사과 품종'까지 파고들고 있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이것은 단순한 주의력 결핍이 아니다.


'나무'라는 키워드에서 시작해 → '열매'(먹을거리 탐색) → '사과'(구체적 관심 대상) → '품종'(세부 정보 수집)으로 이어지는 이 과정은, 탐색가 뇌가 연관된 정보의 그물망을 펼쳐나가며 새로운 연결고리를 찾는 본능적 행동이다.


문제는 현대 사회가 '직선적 집중'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나무 종류만 찾으면 돼!'라는 환경에서, 이런 비선형적 탐색은 비효율로 여겨진다. 하지만 선사시대였다면? 사과를 발견하고 그 품종까지 파악하는 능력은 생존에 직결되는 귀중한 정보였을 것이다.




현대 사회, 탐색가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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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현대 사회가 '관리자'에게 극도로 유리한 환경이라는 점이다.


정해진 시간, 반복적인 루틴, 체계적인 절차가 중요한 시대에서 '광역 스캔' 능력은 오히려 방해 요소가 되어버렸다.




진화적 아이러니


'탐색가-관리자 모델'의 역할 분담을 이해하면, ADHD 뇌가 현대 도시에서 겪는 어려움의 근원을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ADHD 뇌는 과거에 유리했던 '광역 스캔' 능력을 계속 강화하는 쪽으로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에 현대 사회의 고도로 조직화된 환경에서 오히려 더 적응하기 힘든 진화적 아이러니를 겪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선사시대에는 이 능력 덕분에 위험을 빠르게 감지하고,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하며, 부족의 생존에 기여했다. 하지만 현대 도시에서는 광고판, 자동차 소음, 형광등처럼 끝없이 밀려드는 자극들까지 모두 받아들이며 에너지가 소진된다.


ADHD의 '광역 스캔' 능력은 현대 사회에서 만성 피로를 유발하는 주범이 되어버린 것이다.




좌절을 넘어, 전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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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좌절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과거에는 '광역 스캔'이 주력이었다면, 이제는 이 능력을 다른 방식으로 써야 한다. ADHD 뇌가 가진 또 다른 특성, 바로 '하이퍼포커스'를 현대 사회에 맞게 재설계하는 것이다.



얇은 필터로 넓게 보던 힘을 어떻게 '좁고 깊은 몰입'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옛날에는 360도 모든 방향을 스캔하는 '광역 레이더'가 주력이었다면, 현대에는 이 레이더를 180도, 90도, 그리고 마침내 '한 점을 향한 레이저'로 좁혀가야 한다. 넓게 흩어진 빛을 렌즈로 모으면 불을 지필 수 있는 것처럼, 얇은 필터로 받아들이던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하면 누구보다 깊은 통찰과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전환'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이퍼포커스를 '우연히 발동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곳에 의도적으로 발동시키는 무기'로 만들 수 있을까?






본 글에 제시된 '탐색가-관리자 공진화 모델'과 '에너지 소모 구조'는 ADHD를 인지한 이후 약 3년간의 집중적인 자기 분석과 진화심리학적 관점을 결합하여 스스로 도출한 개인의 통찰입니다.


학술 연구가 아닌, 당사자로서의 가설 제기이며 글쓴이가 정리한 모델임을 밝힙니다.


또한, 이 모든 통찰은 ADHD를 단순한 '장애'가 아닌, 인간의 다양한 신경적 특성 중 하나로 바라보는 시각에 닿아 있습니다. 저 역시 그 관점 속에서 제 경험을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이 성찰의 과정이 저뿐만 아니라, 이 글을 보시는 분들께도 스스로의 삶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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