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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다멜리 May 25. 2021

살색 스타킹

돌도 안 된 아이를 맡기고 면접을 보러 갔던 그 날의 기록

욕실 세면대에서 손으로 조물조물 살색 스타킹을 빨았다. 아주 오랜만의 일이다. 한동안 아기의 토 묻은 턱받이나 똥 묻은 바지는 매일같이 빨아왔지만 야들야들한 스타킹을 만져보기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인 것이다.   

외출을 다녀왔다. 살색 스타킹을 신고, 그레이 색 정장 원피스를 입고. 1년 6개월 만에 다시 회사라는 곳에 나가 보려고 면접을 다녀왔다. 입사지원서를 넣을 때에만 해도 사기가 충전했고 거울을 보며 자기소개를 연습할 때만 해도 그럭저럭 괜찮겠다 싶었는데 옷을 챙겨 입다 보니 '아, 내가 참 멀리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썹을 다듬은지도 한참 됐구나,

질끈 묶기만 하던 머리는 어떻게 하지, 아무래도 머리는 미용실 가서 드라이해야겠다,

아참, 지금 바깥 날씨가 어떻더라, 이 옷을 입으면 너무 더워 보이려나,

앗! 검은색 스타킹을 신을 날씨가 아니구나, 겨울인 줄 알았는데 봄이었네! 멀쩡한 살색 스타킹이 있던가...

등등.


그렇게 갈망하던 외출인데 일련의 외출 준비가 이리도 고될 줄이야. 게다가 친정엄마가 와 계신 중에도 나는 아기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있을 수가 없었다. 아기가 조금이라도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화장을 하다가도 후다닥 달려가 아기 상태를 확인하고 뭐가 그리도 미안하고 안쓰러운지 품에 최대한 오랫동안 안아주고, 눈을 마주치며 한참 동안을 웃어줬다. 결국 도달한 결론은


'이 짓을 매일 아침 할 수 있을까'


출근은커녕 면접에 가기도 전에 이미 기진맥진 해 버린 것이다. 오랜만에 신은 하이힐에 휘청거리는 무릎을 이끌고 애엄마나 유모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서울의 도심 역삼동 건물에 도착했다. 면접을 보기로 한 33층에 도착하자 직원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 둘 눈에 보였다. 외국계 스포츠 패션 회사답게 사람들은 자유분방해 보였고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고 있어도 그 사람들은 '사회인', '직장인'의 에티튜드를 자연스레 풍겼다. 눈빛은 냉철했고, 손의 움직임과 발걸음 모두가 정갈하고 모던해 보였다. 말투에는 군더더기가 없었고, 업무에만 집중하는 명료함을 풍겼다. 1년 6개월 전의 내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햇볕도 못 본 채 집안에만 처박혀 있던 나는 혼자 옷매무새를 점검해 본다. 아무리 높은 구두를 신고 각진 정장을 입고 있어도 애엄마의 영혼이 머리 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묵직하게 나를 지배하고 있다. 밤새 한 시간마다 깨어서 우는 아이를 안고 흔드느라 눈에는 여전히 졸림이 가득했고, 서핑과 스노보딩을 타던 처녀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뼈 마디 하나하나가 느슨해져 있다. 너저분하게 하고 나온 집안꼴이, 쉼 없이 모유로 차오르는 젖가슴이, 억지로 미용실에서 꾸미 고온 머리 스타일이 거슬려서 면접에 온전히 집중하기도 쉽지가 않다.


게다가 그동안 사람이 얼마나 고팠던지 면접 중에도 긴장이 조금만 풀릴라 치면 말할 상대가 생겨서 반갑다는 듯이 면접관에게조차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구구절절 쏟아내고 있다. 특히 육아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본연의 목적은 잊어버린 채 가슴에 담아놓은 이야기를 다 털어놓는 등, 완전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이력서에는 결혼 여부나 가족사항에 대해 언급이 안 되어 있었으므로 내가 결혼해서 돌이 안 된 아기가 있다고 답하자 다들 이런저런 질문을 건네기 시작했다. 아기 낳은 지는 얼마나 됐느냐, 회사에 나오게 된다면 아기는 어떻게 할 거냐, 집에만 있다가 나와서 출퇴근하는 게 괜찮겠냐. 등등. '너무 회사에 나오고 싶다'고, '이제 나올 때가 된 것 같다'고 애원하듯 대답했다. 하지만 몇 시간 전 집을 나오는 순간만 해도 나는 이 짓을 매일 아침 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패션 업체답게 최신 트렌드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최신 트렌드, 스포츠 캠페인, 핫한 연예인이라니... 분유값, 좋은 기저귀, 이유식 레시피를 물어본다면 정말 바로 답해줄 수 있는데... 아니, 어젯밤 아이 때문에 잠을 설치지만 않았어도 나는 충분히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란 여자, 패션과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오래 근무했었는데...정말 빠릿빠릿하게 최신 동향을 늘어놓을 수 있었는데...왜 이렇게 된거지.


경력 기술서를 보면서도 '맞아, 내가 이런 일도 했었지. 그때 이걸 어떻게 했지'하고 생경해하는데, 애 때문에 TV도 멀리하고 네이버로는 미세먼지 농도만 검색해 보고 마는 내가 무슨 수로 최신 동향을 파악하고 있느냐는 말이다.


꿈이 뭐냐는 질문을 마지막으로 받았다. 그 대답 하나만 제대로 한 것 같다. "딸아이에게 존경받는 엄마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딸아이가 존경하는 엄마가 됐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정말 의문이다. 어떻게 그 꿈을 이룰 수 있을지. 회사에 들어가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건지, 아니면 더 멀리 가게 되는 건지. 사실 지금으로서는 딸아이가 "엄마는 뭐 하시니?"라는 질문에 가정주부라고 대답하기보다는 뭔가 다른 걸 이야기했으면 하는 소박한 꿈이 있다. 그래서 딸아이가 그런 질문을 받는 나이가 되기 전에 어서 내 자리를 찾았으면 하는 간절함으로 취업시장을 돌고 있다.


물에 젖은 살색 스타킹이 빨랫대 위에 축 늘어진 채 햇빛에 반짝이고 있다. 언제 또다시 신을 수 있을지 기약도 없이.


- 2015년 3월 15일 첫째 아이 8개월 차에 블로그에 남겼던 글입니다. 지금은 다른 스포츠패션 회사 열심히 다니고 있고 그러다 보니 오히려 살색스타킹 신을 일 없이 운동화만 열심히 신고 다니네요.


Photo ©️ kimdonkey,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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