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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랑 Jul 09. 2024

#04. 백수의 왕

 백수의 왕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 드넓은 초원을 뛰어다니며 호령하는 사자가 떠오를 것이다. 오랜만에 켠 TV에서 사자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가 나와 홀린 듯 자리에 앉았다. 백수의 왕이라는 위엄과 달리 사자는 대부분 누워서 빈둥빈둥 시간을 보냈다. 사냥 외에 그들이 할 유흥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인간의 관점에선). 풀밭에 누워 뒹굴 거리는 사자의 모습을 나같이 일없는 백수의 모습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백수(百獸)의 왕이 백수(白手)가 되는 것이다. 사실 이건 큰 오해다. 일없는 백수는 그렇게 하루를 보낼 수 없다. 백수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럴 여유는 사라진다. 뒹굴 거리는 일은 돌아갈 직장이 있고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이 있는 열심히 일한 직장인들의 ‘권한’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백수가 뒹굴 거리며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백수(白手)의 왕이 될 자격이 있지 않을까.

 백수처럼 소리나 같으나 뜻이 다른 단어를 동음이의어라고 부른다. 사자는 백수(百獸)의 왕이라 불린다. 여기서 백수(百獸)는 온갖 짐승을 말한다. 나와 같은 백수(白手)의 백수(白手)는 맨 손을 뜻한다. 손이 비어 일이 없다는 얘기이다. 온갖 짐승의 왕이 아닌 일없는 백수(白手)의 왕이 되기 위해선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퇴사 전 모아놓은 돈이 꽤 있어서 생활에 어려움이 없어야 할까, 어디든 이직할 수 있는 경력을 지니고 있어야 할까, 일할 때는 늘 부족했던 이제는 넘쳐나는 시간을 계획적으로 사용해야 할까 아니면 백수의 왕 사자처럼 뒹굴 거리며 시간을 보낼 줄 알아야 하는 걸까.


 TV 속 우두머리 사자가 일어났다. 뒹굴 거리던 사자도 할 일은 하는 것이다. 사자 무리를 데리고 사냥을 시작했다. 얼룩말 무리가 모여 있는 장소에 도착하자 우두머리 사자의 흐리멍덩했던 눈에 살기가 가득하고 오직 하나의 표적만을 노렸다. 몸을 가볍게 움직이지 않고 마치 본래 거기에 있던 것처럼 땅, 풀, 바위와 하나가 됐다. 얼룩말 무리 가운데 하나가 떨어져 나오자 숨죽이고 있던 사자가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흙먼지가 일어나고 괴기한 소리가 났다. 흙먼지가 가라앉은 가운데 우두머리 사자가 홀로 서 있었다. 놓친 것이다. 몸을 피한 얼룩말은 무리에 섞여 그들과 함께 빠르게 도망쳤다. 우두머리 사자의 사냥을 기다리며 뒤에 대기하고 있던 사자 무리는 코웃음 치듯 이상한 소리를 냈다. 사냥에 실패한 사자는 멀뚱히 서서 먼 곳을 바라보며 괜히 앞발로 땅을 찼다. 나는 TV 앞에서 뒹굴 거리며 이 장면을 봤다. 이제 그도 나도 백수(白手)의 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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