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걸(책) 뭐 하러 그렇게 읽어대는지
도통 모르겠구먼.’
언니와 동생은 늘 책을 데리고 다녔다.
나나 데리고 다니지, 걔들이 뭐가 좋다고
저리 시시때때로 훑어쌓는 것인지,
나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데리고 다닌 녀석은
고작해야 시집 몇 권.
시가 뭔지도 모르는 열네 살
소녀의 손에 들린 것은
알 수 없는 ‘동경’과 ‘낭만’이었다.
그 시절, 시집을 제외한 책은
나에겐 무용한, ‘삶’의 어떤
대체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조금은 조숙했던 탓일까.
아무튼 나의 학창 시절 문학이란 것은
한겨울 따듯한 이불에 데워질 지치고 병든
심신을 위해 긴긴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2.
내가 만났던 뭇매는 정확히 일상 그 자체였다. 애늙은이처럼 아주 어려서부터 나는 항상
‘왜?’라는 물음을 달고 살았다.
'왜 나만.. 왜... 왜...'
그 수많은 ‘왜’에 대한 질문 속에서도
나를 향해 방긋대는 것들은 있었다.
종이만 있으면 휘갈겨대곤 했던
활자들의 조용한 두런거림.
못 다 쓰고 버려야 하는 공책이
있으면 안 되는 형편에도
내 주변엔 새것 같은 헌 공책이 많았다.
거기에 볼을 흘러내리는 눈물줄기에도
낭만연지를 발라 주었던
나는 쓰고 또 썼다.
그러던 어느 날, 보여지는 형식이
시라고 해서 감동의 된서리를 맞은 듯한
표정의 선생님은 내 낙서를 보고
‘그건 시야, 정말 잘 썼네.’
하곤 했지만,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내 낙서는 어느 날엔
시화라는 이름을 달기도 하고
분량이 많아지니 시집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예닐곱 권쯤 되는 내 어린 날의
시집은 잦은 이사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때의 난 그것들을 보관해야 된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아무래도 또 쓰면 된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3.
내가 지나왔던 주변상황과 세상은
온통 향기로운 슬픔의 독毒 같았다.
또 그래야만 한다고,
그렇게 읽지도 않은 소설 속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남들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싶어 했다.
와중에 엄마에게 받았던 상처,
중간에 끼인 차녀로서의 줄기찬 고독,
또래집단에서의 부적응,
어른 같잖은 어른들의 이해할 수 없는
일방적 언행- 에 노출되면
노출될수록 나는 누구보다 더 아프고
더 슬프고 더 많이 눈물지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꼭 그렇게 했다.
누구에게도 장담하지 않은
혼자만의 다짐이었건만, 그건 마음에 달린
손가락을 걸어가며 꼭 지켜야만
하는 일종의 약속이었다.
시집인지 일기인지 낙서인지 모를
내 장쾌한 슬픔의 기록들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4.
가슴으로 주절거리는 용량이 최대치에
이르렀을 때 문학의 힘은 발휘된다.
아마도 그런 것 같다.
많은 걸 알지 못해도 모르면 모른 채로
알면 또 아는 만큼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
문학과 벗 삼아 사는 데에는 아무런 이유나
조건이 필요 없다. 아무리 난해해도
내가 이해하는 만큼만 수용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더불어 문학은 100% 완벽하게 이해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자괴감과
부족한 지식에의 갈구가 주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네
병든 영혼까지도 달래준다.
조각조각 찢어진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시려 터지도록 아픈 고통에 공감해 주고,
아슬아슬한 고독이란 외줄 타기 생에
균형이란 친구가 되어주고,
가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우릴
타임머신에 태워
이상국에도 데려다 놓는다.
달나라에도, 외계인이 산다는 우주에도,
조선시대에도, 과자마을에도-
어느 때時, 어디라도 가지 못할 곳이 없다.
시공간을 초월한 문학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있다.
이렇듯 문학은 자격요건과 제한을 두지 않은 영원불멸한 우리 모두의 벗이다.
5.
[정여울의 문학 멘토링]은 이런
뉘앙스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하니 머리와 가슴이 시키는 대로
맘껏 누리라고. 뭐든 다 받아줄 테니
걱정 말고 스트레스받지 말고
무작정 쏟아내고 미치고 날뛰어라.
포용하고 안아주고 입 맞춰주고
필요하다면 함께 펑펑 울어주겠다는
문학의 그 든든함을 믿어라.
누가 이름 붙여주었는지,
이 ‘문학’이란 아련함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다.
문학의 아련함은 언제나
신선하고 활기차다. 또 애달프다.
나도 네 살 된 남동생을 병으로 잃었다.
정지용 시인의 아들을 잃은
‘슬픔’에 공감 비를 뿌리며
이 글을 마친다.
유리창(p202)
정 지 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새처럼 날러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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