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rls Never Die
bgm- 트리플에스 Girls Never Die
와 함께 읽어주세요.
https://youtu.be/2tda_TCjz8w?si=aQRSYjRee8EtVu2T
언제나 신기한 산업이었다. K-pop은.
이 분야만큼 소비자가 함부로 다뤄지는 경우가 정말 드물기 때문에.
트위터에는 수시로 제보가 뜬다. 공항에서 좋아하는 아이돌을 기다렸다가 경호원에게 폭행에 가까운 밀침을 당하거나 욕설을 들었던 사례들이. 팬사인회나 다른 이벤트에 참석했다가 불쾌한 몸수색을 당하고 고객이 아닌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을 당했던 사건들이 제대로 공론화되지 못하고 SNS에서 돌다가 사그라든다.
다른 산업이었다면 큰 문제가 되고 아주 오래전에 시정되었을 일들이, 그러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소비자라는 정체성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팬덤을 기다리는 것은 대체로 모욕이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아이돌을 좋아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었던 악의적인 명칭이 있다.
빠순이 빠돌이들.
팬덤에 대한 이 모욕적인 멸칭의 기원은 한국에 아이돌판이 형성되기 시작했던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멤버들 자체가 모두 10대였던 H.O.T가 등장하고 수많은 10대 팬들이 미디어 산업의 주요 고객층으로 급부상했던 시기. 대체로 이 사랑은 이성을 향하는 경우가 많아서 H.O.T의 주요 팬층은 소녀들이었고 소녀들은 언제나 손쉬운 공격의 대상이었다. 만만하고 유약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여성인 데다 어리기까지 한 이들에 대한 멸칭은 정말 순식간에 지어졌다. 아이돌 음악은 진정한 예술이 아니라는 대중문화에 대한 혐오까지 더해져서 음악성도 떨어지는 남자아이들을 따라다니는 그루피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H.O.T팬이었던 내 친구에게 나이 든 남자가 너 빠순이잖아라고 시비를 걸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 남자는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누구도 그가 만화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 앞에서 대놓고 넌 오타쿠잖아라고 말하지 않았었다는 사실도. 그러니까 그만큼이나 만만했던 거다. 소녀였으니까.
이 기괴한 현상의 원인을 알고 싶었었다. 어째서 클래식이나 발레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늘 정중한 대접을 받지만 아이돌 음악을 좋아하는 건 문제가 되는 걸까. 심지어 반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록조차 팬들은 음악을 아는 사람이라고 존중받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소녀 팬덤을 열광하게 했던 것은 단지 멤버들 때문만이 아니었다. 최근 발매한 트리플 에스의 Girls Never Die 뮤비 댓글창은 팬들이 써 내려간 자신만의 서사와 고백들로 가득하다. 당시 아이돌 산업 내 기획이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한 예술가가 기획사 눈에 띄어 계약을 하고 자신의 메시지를 곡에 담는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한다는 고전적 가수의 개념과 다소 거리가 먼 것은 사실이지만 SM이 조직적으로 만들어내려 했던 새로운 형태의 아티스트는 분명 당대를 향한 문제의식과 소외되어 왔던 (그래서 블루오션이었던) 10대들이 갈망했던 이야기들을 적극적으로 음반 안에 담으려 했던 뉴타입이었다.
트리플에스 Girls Never Die mv에 공유된 리플들
10대의 승리라는 부제처럼 당시 탄생했던 수많은 아이돌들은 터부시되던 10대의 성적인 열망, 사랑과 연애에 대한 호기심, 억압적인 사회문화에 대한 반감, 일탈적이고 전복적인 상징들을 포괄하며 빠르게 10대 팬층을 공략해 나갔다. 특히나 이 모든 것들을 수행해 내는 주체가 같은 10대라는 사실은, 실은 그들 이면에서 20대 30대의 작곡가들이 기획한 것이라 할지라도, 같은 10대인 팬층에 강렬하게 어필됐고 30대 이상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대중문화 시장에 거대한 균열을 일으키며 경제소비의 주체로서 팬덤이나 아이돌 모두를 빨아들이며 급속도로 탐욕스러운 산업의 기틀을 다져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시 오해한다. 빌보드 진입, 수많은 명품 엠버서더, 세계적으로 유명한 셀럽들과의 컬래버레이션. 휘황찬란한 외피를 쓴 이 K-pop 씬의 동력을 팬덤의 욕망에서 찾는 시각. 이 바닥은 언제나 겉치레를 좋아했고 그렇기에 탐욕스럽다는 인식. 그러나 과연 그럴까.
아이돌 판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팬덤의 욕망이 생각보다 소박하다는 걸 발견하고는 한다.
이들의 바람은 굉장히 심플하다.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만족스러운 조건 속에서 부디 오래 건강하게 무대 위에 오를 수 있기를. 순식간에 정상을 찍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괴롭고 힘들어서 비관하거나 생을 마감하지 않고 그 나이대에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함께 나이 들어가기를 바라는 거다. 그러니까 나는 다시 생각한다. 이 씬의 저 화려한 욕망들은 어디로부터 태어난 것일까 하는.
아이돌 산업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판단이 서자 기획사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애정에서 기반한 산업이니만큼 멤버들의 인기를 상품화하고 더 나아가 그들의 사생활조차 판매하기 시작했다. 유사 연애 감정이 문제라고 하면서 이들은 연인과의 통화 같은 느낌을 주는 버블을 만들었고 멤버 간의 차별을 가혹하다고 말하면서도 멤버별 포토카드를 따로 만들어 판매한다. 아이돌은 당신의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는다고 경고하면서도 수백만 원을 지출해야 뽑힐 확률이 높은 팬사인회를 운영하고 더 많은 돈을 쓸수록 더 친밀한 사이처럼 착각할 수 있는 이벤트들에 당첨될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한다.
그러니 다시 묻고 싶어 진다. 이것은 팬덤의 의지인가 산업의 의지인가.
최근 화제가 된 민희진의 기자회견에서 전부 지적되었던 문제지만 사실은 팬덤 내부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문제의식을 지니고 끊임없이 지적되어 왔던 이슈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또다시) 오해하는 것과는 다르게 팬덤은 맹목적인 군집이 아니라 합리적인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습게도 예술이 아니라는 이유로 쉽게 멸시당하던 아이돌판이 팬덤의 지속적이고 무조건적인 헌신과 지지를 발판으로 삼아 세계적 산업으로 성장하자 그동안 이 씬을 향해 거리낌 없이 경멸의 언어들을 던졌던 비평가들이 제일 먼저 돌아섰다. K-pop의 지속가능성, 해외 진출 전략과 같은 전문 경영의 언어들이 문화비평을 대체하고 이 씬 내부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던 문제들은 마치 없던 일처럼 음소거 됐다. 이 와중에도 팬덤에 대한 시선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아 이 산업의 기반을 적극적으로 다져왔던 또 하나의 강력한 주체로서가 아닌, 전략에 따라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팔로워라는 정도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많은 담론들이 다뤄지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스밍, 수많은 쓰레기를 양산하는 CD앨범, 멤버별 포토카드, 심지어 연습생에게 빚을 씌우는 불공정 계약에 대한 문제제기는 언제나 팬덤 내부로부터 시작됐다.
가장 가까이에서 이 산업을 지켜봐 온 관찰자로서 소녀들은 성장하며 이제 산업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그렇다. 소녀들은 성장한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용돈으로 앨범을 사고 이벤트에 응모하던 소녀들은 아이돌 산업의 역사와 더불어 함께 자라났다. 10대 소녀들은 20대 여성이 되고 30대 전문인이 된다.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투영하고 아티스트와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감각은 유사 연애보다 이제 (좋아하지 않는 표현이지만) 유사 육성의 형태로 변형되어 가고 있다. 내 삶에 관심이 있고 내가 겪는 문제들을 진중하게 다뤄주는, 때로는 근사한 퍼포먼스로 대리만족 시켜주는 아티스트에 대한 애정은 단순히 이성적인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기획하고 뚫어 나가는 그 치열한 생 속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일종의 쉘터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진지하다. 빠순이라는 멸칭을 듣고도 어찌할 바를 모르던 소녀들은 이제 자라나서 파이트 백 할 수 있는 성인으로 단단히 자신의 기반을 마련하고 주체로서 버티고 서있다. 그런 그녀들을 여전히 과거와 같은 인식으로 밀치고 때리고 욕하고 폄하하는 게 가능하겠는가. 과거에는 문제 삼지 않을 일들이 끊임없이 SNS를 통해 거론되고 어떻게든 공론화하려는 움직임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 이면에 꿈틀거리는 뜨거운 용암과 같은 힘을 느낀다.
그래서 다소 막연한 예감이지만 개인적으로 이 씬이 봉착해 있는 오래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주체는 그녀들일 거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모든 것을 현금화하는 기획사나 평론가들이 아니라 바로 팬덤만이, 그 누구도 아닌 팬덤만이 이 산업이 지니고 있는 모순을 기민하게 감지하고 제조되는 상품 속에서 아티스트라는 사람을 발견해 올릴 것이다.
수많은 아이들이 지쳐 꺾여 사라질 때 이 씬 안에 사람이 있다고 외쳤던 이들 역시 모두 팬덤이었기에. 그렇게 각자 자신의 아티스트를 잃어본 적이 있기에.
그래서 나는 희망한다.
이 오래된 모욕을 그 누구도 아닌 팬덤의 손으로 끝장내기를,
환경과 노동과 인권의 이야기를 그녀들의 목소리로 더 확산하기를.
더 강하고 더 크게.
이곳에 사람이 있고 우리는 이 산업을 돈으로만 환산하는 주주들과는 다른 결정을 원한다고.
세계 정상은 모르겠고 다양한 오리지널리티를 지닌 매력적인 아티스트들과 더 오래 더 행복하게 이 씬이 변화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고.
그게 팬덤의 욕망이라고 이야기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