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CIN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ulblue Jun 17. 2023

모든 것은 사랑의 이름으로

엘리멘탈(2023)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 보시고 나서 읽어주세요.

4가지 원소로 이루어진 세상인 엘리멘탈. 영화는 인종과 전통 그리고 가족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더 정확히 분류하자면 표면적인 틀은 인종 간의 문제를, 내밀한 틀은 가부장제에 대한 이야기를. 유독 엘리멘탈이 한국에서 소구 되는 이유는 역시 후자에 있다. k장녀들은 무슨 말인지 알 테지만.


기본적으로 엘리멘탈은 불인 앰버와 물인 웨이드의 러브스토리다. 서로 다른 종족인 두 사람은 그 어떤 인종보다 섞이기 힘든 기질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 뿌리 깊은 차별을 당해온 불 종족은 물 종족을 극도로 꺼려한다. 이들은 여러 이유로 전설의 꽃 비비스테리아를 구경하는 것도, 유리로 지어진 도시에서 집을 구하는 것도, 합법적인 가게를 꾸려가는 것도 저지당한다.


먼 고향을 떠나 엘리멘트 시티에 정착한 일족. 앰버의 눈매와 기질, 그리고 그녀의 가족 일면을 살펴보면 금새 눈치챌 수 있듯이 불 종족은 미국으로 이주한 아시안을 상징한다. 기회의 땅에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제손으로 마련해낸 이들. 그러니까 앰버의 종족들이 자체적으로 모여 살기 시작한 파이어 타운은 한인타운이나 차이나타운인 셈이다.


수많은 한인 1세대들이 그곳에서 세탁소나 편의점을 꾸려 이민의 삶을 꾸려갔다. 그들의 자녀들에게는 더 나은 선택지가 존재하길 기대하면서. 그러나 이들의 희망과는 달리 기회의 땅인 미국에서도 선택의 문은 다소 편협하게 열려왔고 때문에 대부분의 한인 2세대들은 부모의 높은 교육열에 시달리다 의사가 되거나 아니면 가게를 대대로 물려받으며 가업을 이어왔다. 미국 아시안 1세대들은 특히 자녀가 돈이 안 되는 예술을 한다면 질색하는 걸로 악명이 높은데 아시안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이 이를 개그 단골 소재로 삼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앰버의 운명 역시 어느정도 예정되어 있었다. 이민 1세대 부모가 어렵게 일궈낸 상점을 유지하고 물려받는 것. 아버지로부터의 인정이야말로 그녀가 어떻게든 획득하고 싶었던 유일한 삶의 기준이었기 때문에 앰버는 아버지처럼 좋은 상점 주인이 되기 위해 전력을 다해 노력한다. 자신을 위한 더 나은 미래를 찾아서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대륙을 향했던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기에 그녀는 정말로 그러려고 했다. 기꺼이. 그러다 앰버는 웨이드라는 다른 원소를 만나서서히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지만 영화 엘리멘탈은 앰버와 웨이드 두 사람이 인종 간의 장벽을 넘어 사랑의 결실을 이룰 수 있느냐를 중심 축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역시 한국 장녀로서 그보다는 앰버와 그의 아버지 버니와의 관계성에 더 주목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쪽이 더 흥미롭잖아. 이입도 쉽고.


사랑의 이름으로.


앰버의 부모인  버니와 신더는 전형적인 가부장 문화권 내 부부 모습으로 재현된다. 버니는 집을 만들고 배관을 수리하고 가게를 운영한다. 신더는 그를 돕거나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무려 점술과 소프 오페라에 심취해 있다. 전형적인 ‘아줌마‘ 재현이다. 그래서 이들이 불행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서로를 사랑하며 좋은 가정을 만들어 간다.


신더는 버니를 사랑하기에 이들이 합류한 체제에 안주할 수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녀의 가정을 아끼며 사랑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버니 역시 마찬가지다. 궂은 일을 도맡으며 그는 그의 가정을 지켜낸다. 이런 버니와 신더의 목적은 가게를 유지하고 집안의 불을 대대로 전수하는 거다. 그들의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불의 고향을 떠나오며 버니는 그의 아버지를 향해 불의절을 한다. 아버지의 축복을 아들에게 전하는 의식이지만 그는 더 나은 삶을 위해 고향을 떠나는 결정을 한 죄로 아버지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 이주와 이민은 종종 불효로 간주되기도 하는데 표면적으로는 부모를 곁에서 모시지 못한다는 제약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가부장제에 직접적인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이주는 지켜야 할, 그러니까 소유하고 있는 토지와 재산이 근본적으로 제로 세팅되는 경험이기에 경제적 자산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전통과 문화라는 상부를 총체적으로 뒤흔드는 경험이다. 더욱이 균일하지 않은, 다양한 새로운 문화로의 적응이란 미션은 공고히 다져온 체제에 커다란 균열을 일으킨다.


버니가 이주를 선택하며 본의 아니게 1차 균열을 낸 가부장제는 엘리멘트 시티라는 메트로 폴리스로 건너와서 또 한 번 흔들린다. 대대로 가게를 잇는 것보다 자신의 예술을 하고 싶어진 앰버의 꿈은 결국 가게를 혈족에게 전승한다는 버니의 소망을 위협할정도 커져간다. 이 지점에서 앰버는 종족이 다른 웨이드와의 연애보다도 더 큰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그녀의 소중한 아버지를 상처 주고 싶지 않았던 거다.


가부장제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그 모든 것들이 사랑의 힘으로 유지된다는 점이다. 신더도 앰버도 그리고 심지어 버니도 종족과 가게, 바꿔 말하자면 전통과 가계를 전승하겠다는 욕망을 사랑의 마음으로 키워간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대상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상냥한 마음이 스스로의 자유와 행복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한다는 아이러니. 그 안에서 구성원들은 분노와 증오가 아니라 애정과 배려 때문에 고통받는다.


버니는 그의 아버지를 사랑했기에 그에게 답례의 절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평생의 한으로 남는다. 앰버 역시 그녀의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꿈에 용감하게 다가가지 못한다. 어떠한 물리적인 강요도 폭언도 없었지만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로도 인간은 강력한 구속을 당하게 된다. 앰버는 웨이드에 대한 마음보다도 가게를 물려받기 싫다는 자신의 솔직한 욕망에 더 큰 상처를 입는다. 그녀가 꿈을 포기하면서까지 잃고 싶지 않았던 가장 소중한 것은 아버지와의 유대였다. 앰버는 사랑의 이름으로 억압받는다.


그러나 역시 사랑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멘탈 내 종족의 가부장제를 패퇴시키는 강력한 힘의 근원 역시 사랑이었다. 자연재해와도 같던 거대한 강의 범람 이후 종족의 불을 지키느라 딸을 잃을 뻔한 버니는 웨이드를 잃고 나서야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는 자신의 딸 앞에 푸른 불꽃이 든 랜턴을 한쪽을 밀어내며 이야기한다.


“나의 꿈은 언제나 너였단다.”


버니에게 푸른 불꽃은 그의 종족을 상징하는 신성한 힘으로 자신과 그의 선조들을 연결하는 전통을 의미한다. 그가 목숨처럼 소중히 지켜왔던 형식이자 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그런 랜턴을 밀어내고 버니는 앰버에게 그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건 바로 형식이 아닌 목적으로서 자신의 딸인 앰버였다. 언제나. 늘 그래왔다. 버니와 신더가 그들의 아이를 위해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오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두 사람이 앰버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가부장제가 사랑의 힘으로 유지되는 거라면 그것을 형해와시키는 힘 역시 같은 뿌리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을 바라는 상냥함이,


피와 살을 지닌 살아있는 존재로서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지워버리는, 앙상한 뼈처럼 형식만 남은 전통이라는 체제를 무너뜨리는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


생에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가?


당신의 소중한 사람인가 체제인가.


버니는 복잡하게 고민하지 않고 답을 정한다. 그가 행했던 모든 것들이 실은 앰버의 꿈과 행복을 위한 것이었으니 그리 어렵지도 복잡하지도 않았던 문제인 셈이다.


유리 공예사로서 첫출발을 앞두고 엘리멘트 시티를 떠나기 직전 앰버는 버니에게 절의 의식을 행한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의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인정을, 그래서 일생의 상처로 남았던 못다한 축복을 버니는 그녀에게 온전히 채워 되돌려준다. 이 부분이 바로 한국의 장녀들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지점이다. 두 사람의 절이 상징하는 것을 이해하기에. 앰버가 버니로부터 획득한 것은 오롯하고 완전한 애정이자 절대적인 지지의 제스처였다. 세상의 모든 딸아이들이 바라마지 않았던.


와해된 가부장제의 잔해 속에는 이제 순수한 사랑만이 남아 있다. 비로소 형식은 목적을 위해 복무한다. 앰버와 버니를 구속하던 제약들은 이제 서로를 향하는 응원의 자원이 된다. 그들의 전통은 그녀를 축복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사랑하는 이들의 지원과 보호를 받으며 앰버는 그 어떤 불의 종족도 다가가 보지 못했던 신세계를 향한 새로운 항해를 시작할 것이다. 구속과 차별은 지나가버린 과거의 유물이 된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의 이름으로.


역시 연애보다 더 대단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상 k장녀가 엘리멘탈을 좋아하는 이유.


p.s 픽사 디자인은 어딘지 좀 상품화하기에는 어색한 느낌이 있다. 잘 빠진 미형의 디즈니 작품들과는 다른, 어딘지 애니메이션 학과 졸업 작품 같은 디자인이랄까. 그게 매력이긴 해.




매거진의 이전글 성실한 사람들을 향한 애틋한 헌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