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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lblue Oct 02. 2023

지브리에서 어떤 작품을 제일 좋아하세요?

인간의 선택에 대한 가장 따뜻하고 강인한 믿음, On your mark

"지브리 작품 중 뭘 제일 좋아하세요?"

"뮤직비디오. 뮤직비디오를 제일 좋아해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삶에 대한 긍정을 만화로 표현한다면 그의 작품들이 될 것이라고, 그래서 그의 수많은 필모 사이에서 만일 너의 집에 프로젝터가 있다면 하루 종일 어떤 걸 틀고 싶어?라고 다시 묻는다면 내가 고를 작품은 바로 이 7분이 안 되는 뮤직비디오다.

On your mark, Chage & Aska


차게 앤 아스카라는 그룹의 뮤직비디오로 제작한 on your mark는 핵전쟁 이후 사회를 그려낸 초 단편 (대사가 없다는 점에서) 무성영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부분 작품이 그러하듯이 그가 그려내는 세계는 화려한 마법과 과학기술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이미지들의 근원을 찾아 내려다가 보면 그가 그려낸 모든 이미지들이 실은 우리의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가지로부터 태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언제나 그렇다. 그의 가장 놀라운 재능 중 하나는 그가 실제로 겪었던 현실의 사건들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풍성하게 피워낸다는 점이다. 모든 감독들이 자신의 삶을 작품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겠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경험들을 적극적으로 작품 속으로 끌어들여 영감의 원천으로 삼는다. 전쟁과 살인, 자연재해와 환경오염과 같은 재난과 재해들이 마법과 기술의 힘을 빌어 초자연적인 존재가 되어 스크린 위에 등장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간을 믿는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개인의 힘을.


차게 앤 아스카의 on your mark는 그런 그의 세계관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곡의 배경이 되는 세상은 핵오염으로 지상 위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인류가 초고도화한 기술의 힘을 빌어 인공도시를 만들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오염된 대지와 사이비 종교집단이라는 구체적인 문제점들은 당시 일본 사회가 처해있는 현실의 정확한 반영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제 뮤비 속 두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속해있는 사회가 스스로 만들어낸 현실의 문제들을 가상의 미래 시공간 속에서 해결해 내야 하는 것이다.


주인공들의 선택마다 달라지는 독특한 다선 구조의 이야기


두 사람은 긴 시간 합을 맞춰온 파트너로 무장한 사이비 종교집단을 진압하는 미션에 투입된다. 그곳에서 이들은 종교집단에 억류되어 있던 날개가 달린 여자아이를 발견한다. 뮤직비디오는 단선적인 구성이 아니라 다양한 선택지를 기반으로 3가지 다른 결말을 연결시킨다. 특정 분기에 내린 주인공들의 선택에 따라 결말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서로 완벽히 다른 결말로 종결되는 닫힌 구조가 아니라 이전의 결말이 조금씩 보완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거칠게 말해  A, B, C라는 세 가지 다른 결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A, A', A"와 같이 점진적으로 더 희망적인 결말을 향해 조건들이 수정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차게 앤 아스카의 On your mark는 인간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적확히 표현하자면 이 작품은 잘못된 선택을 되돌릴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다루고 있다.


A.

작품에 등장하는 첫 번째 버전 속에서 두 사람은 날개를 가진 소녀가 쓰러져있는 것을 발견하는데 그친다. 그들에게 주어진 미션은 사이비 종교집단을 진압하는 것으로 그 이상의 일들에 대한 어떠한 의무나 책임이 없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소녀를 구조하거나 도와야 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뮤비의 첫 장면은 거기에서 멈춘다. 두 사람이 자신이 맡은 임무에만 충실했을 경우의 결말이다.


A'

소녀를 발견하고 멈춰버린 시간은 다시 한번 이전의 상황으로 시간을 되돌린다. 두 사람은 소녀를 다시 찾아내고 그 지점에서 멈췄던 이전 버전과 달리 탈진해서 쓰러져있는 소녀에서 물을 건네어 마시게 한다. 이 버전에서 두 사람은 사람다운 다정함을 보여준다. 이들은 처음 버전과 다르게 경찰의 일원으로 착용하고 있던 마스크를 벗고 맨 얼굴을 드러내고 쓰러져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들을 살펴 제공함으로써 타인을 돕는다. 그러나 소녀가 그녀를 실험하려는 기관에 끌려가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그들 역시 정부에 속해있는 경찰이며 동시에 국가로부터 구속되는 시민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버전의 시간은 첫 번째보다 더 오래 지속된다. 이들이 마스크를 벗고 소녀에게 물을 건넨다는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타인에게 다정함을 보여줬던 인도적인 선택에만 머물지 않고 부조리한 구조의 문제를 직시한다. 누군가에게 친절하기란 쉽지만 옳은 일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내밀히 들여다보고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과 문제를 정확히 인지할 수 있는 사유가 가능해야한다. 옳은 일을 선택하는 것은 이성적이고 복잡한 행위일 수밖에 없는데 그건 단순히 누군가를 사랑하는 낭만적인 일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옳은 결정을 위해 희생해야 할 것들을 구체적으로 가늠해봐야 하는 냉철함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소녀가 잡혀있는 기관에 침투할 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소녀를 구한다.'는 옳은 결정을 하기 위해 정부의 법을 어기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을 배신한다. 기관에 침입하는 과정에서 동료들에게 약품을 사용하고 차량을 탈취한다. 결국 그녀를 구출해 낸 두 사람은 소녀에게 위험한 인공도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전력 질주한다.


이제 이들은 경찰이 아니라 도망자 신세가 된다. 자신들을 쫓는 추격대를 피해 가느다란 교각 위를 달리던 이들은 경찰 기체가 다리와 부딪히며 땅으로 추락한다. 추락하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날개가 있는 소녀만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떨어져 내리는 차체 위로 올라가 소녀에게 날개를 사용해 달아나라고 외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의 희망은 좌절되고 소녀는 두 사람과 함께 땅 위로 추락한다.



두 번째 버전은 이들이 완전히 추락하기 바로 직전에서 멈추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소녀가 날개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원 사망했을 거라고 해석하는 것과는 달리 나는 이 두 번째 실패의 원인을 소녀가 역으로 두 사람을 구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믿는 편이다. 소녀는 날개를 사용해 피하라는 두 사람의 손을 꼭 잡고 도무지 놓질 않는다. 이제 역으로 추락하는 그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자신밖에 없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를 포기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도시 아래로 함께 추락한다.


A"

세 번째 버전이 다시 시작된다. 이들은 마스크를 벗고 소녀에게 물을 건네고 옳을 결정을 위해 수많은 범법 행위를 다시 저지른다. 두 번째 버전의 마지막 순간이었던 교각 붕괴 시점이 다가오자 이번에는 차량이 추락하지 않고 짧은 시간 동안 비행을 한다. 이게 환상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이유는 차량에서 새어 나오는 에너지의 빛이 일반적인 비행체의 그것과 매우 다른 종류의 것으로 보인다는 데 있다. 그러나 어찌 됐든 차체는 추락하지 않고 건물에 처박힌다. 거주지역으로 보이는 건물에서 이들은 알파 로메오 스파이더로 추정되는 근사한 올드카를 몰고 도시밖으로 달린다. 오염돼 더 이상 인류가 살 수 없다고 믿어지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향하는 도시 밖은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에 등장하는 부해의 공간과도 같다.


도시 밖으로 벗어나기 위해 달리는 로메오 위로 '태양주의', '생명을 담보할 수 없다.', 'Extreme Danger'와 같은 경고가 지나쳐간다. 인공도시를 벗어나 낡고 낮은 건물들이 보이는 구 시가지로 들어서자 소녀는 차체 위로 떠오른다. 마치 아이에게 처음으로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주는 것처럼 두 사람은 소녀가 마주 불어오는 바람에 올라타 수월하게 날갯짓을 할 수 있도록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달린다. 이윽고 아이는 날개를 활짝 펼치고 그들의 바람대로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오른다.


전술한 탈취차량에서 방출된 에너지의 기묘함 때문이라도 마지막 3번째 버전이 작중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전원 사망이라는 두 번째 결말에서 비롯한 환상인지는 잘 모르겠다. 설령 인공도시로부터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더라도 인간이 생존할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된 지상 위로 나온 세 사람이 무사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뮤직비디오에서는 결국은 옳은 일을 선택한 개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결말의 가능성을 무척 아름답고 희망적으로 그려낸다.


극의 결말이 수정될수록 점진적으로 선명해지는 개인으로서의 정체성 


두 주인공의 정체성은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 속에 드라마틱하게 수정된다. 이야기 구조가 수정되는 것과 유사하게도.


첫 번째 버전에서 두 사람은 독창성을 지닌 개인이 아니라 조직과 사회에 충실한 일원으로 그려진다. 성실하고 충직하다. 이들의 정체성은 모든 조직원들이 사용하고 있는 동일한 마스크 아래 가려져있다. 개개인으로서의 특성이 마스크라는 익명성 아래 숨겨져 있던 셈이다.


두 번째 버전에서 이들은 조직과 사회라는 추상적인 대상에 복무하는 존재가 아니라 눈앞에 실재하는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는 다정한 개체로 그려진다. 이 버전에서 두 사람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법과 논리를 존중하면서도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을 돕는데 주저하지 않는 존재로 재현된다. 그래서 이 버전에서 두 사람이 마스크를 벗는 장면은 매우 중요한 상징이다. 서로의 표정을 알 수 없고 그렇기에 감정을 전달할 수도 없게 만드는 마스크를 벗는다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고 타자를 직접 대면한다는 점에서 매우 능동적이며 더 나아가 집단 속에서 거세당한 개인의 독창성과 개성을, 그리고 감성과 공감을 복원하는 행위다.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느끼는 존재는 이제 옳은 일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간다. 좋은 일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감성만이 아니라 성찰과 사유가 필요하다. 이들은 고통받는 타인에게 연민을 느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를 구하기 위해 지금껏 그들이 속해있는 사회의 규범에 반하는 결정을 한다. 그 결과 그들이 충실히 수호해 온 원칙과 규율을 적극적으로 배반해야 하더라도 나아가 자신들이 속해있는 세상의 논리를 파괴해야 하더라도. 기꺼이.


세 번째 버전에서 그들은 집단의 일원이 아니라 사유하고 반성하는, 그리하여 결국은 자신들의 잘못과 오류를 스스로 수정할 수 있는 진보한 존재인 개인으로 바로 선다. 누군가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다. 그 연민을 넘어 비극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세상의 부조리가 실은 자신이 내린 잘못된 결정들로부터 발생했음을 인지하고 이것을 수정하는 일이야말로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다. 두 주인공은 아이가 처한 곤경이 어떤 절대적 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지키고 보존하려 했던 세상으로부터 기인했음을 발견한다. 그렇기에 스스로가 몸 담고 있는 집단으로부터 등을 돌릴 용기를 낸다. 충직한 집단의 일원에서 사유하는 개인으로의 발전이다.


무엇보다 이 세 번째 버전으로의 진전은 두 번째 버전에서 보여준 인간적인 다정함과 감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냉철한 이성과 사유조차도 결국 타인을 향하는 따뜻한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완벽히 무용한 것이기에. 이 마음을 잊는다면 인류는 언제든지 다시 첫 번째 버전으로 퇴보한다. 맹목적이고 사유하지 않는.


오류도 구원도 결국은 스스로의 선택에서 비롯된다.


On your mark는 등장인물들의 선택에 따라 계속해서 수정되는 결말을 통해 말한다. 인간은 언제든 잘못된 결정을 할 수 있는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다. 그러나 그런 인간을 진실로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잘못과 오류를 스스로 수정해 나갈 수 있는 능력에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선택을 바로잡아가야 한다고.


작품 내에서 그려지는 디스토피아, 그러니까 전쟁과 폭력 그리고 기술의 오류와 환경오염과 같은 것들은 인류가 스스로 내린 결정에 의해 촉발된 문제들이다. 통제된 오염구역, 눈부신 기술의 발전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인간의 아둔함 (그래서 사이비 종교에 사로잡히고 만), 이기적인 욕망으로 타인을 억압하는 잔인한 인류의 본성과 같은, 우리가 스스로의 나약함으로 차곡히 쌓아 올린 카르마를 수정할 수 있는 것 역시 오로지 우리들 뿐이라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야기한다. 자신이 일생동안 경험한 세상을 통해 그것을 배웠노라고. 어떠한 거대한 문제라 할지라도 결국은 그 오류를 바로잡는 것은 아주 작은 인간 개인이라고.


그래서 나는 이 뮤직비디오를 정말로 좋아한다. 인간

개인의 힘과 가능성에 대한 가장 따뜻한 낙관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p.s

개인적으로 이 영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소녀를 기관에 넘겨준 뒤 바에 앉아서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두 주인공의 모습이다. 이 장면은 아마도 두 사람이 퇴근 후 자주 들렀을 단골 가게 내에서 이뤄지는 지극히 일상적인 광경인데 그 어떤 극적인 장치도 존재하지 않지만 가장 격렬하게 고민하는 인간의 내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강력하다. 우리는 저 표정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이 과연 옳은 선택을 했던 것인지, 스스로가 내린 결정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는지를 치열하게 되묻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잘못된 결정을 정정할 수 있는 용기를 내는 게 어떤 대단한 영웅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리는 수많은 잘못들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는 역시 자기 자신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 평소와 같은 퇴근길에 들른 단골 가게에서 저녁을 먹다가도, 결국은 한 존재의 자유를 되찾아주는 거대한 결정을 할 수도 있는 거라고 이 장면은 속삭인다.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는 보통의 존재들이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킬 희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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