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울대리 Oct 22. 2024

여행 후 남은 것들


[갑자기 여행이 가고 싶어서 항공권을 구매했어]


10월이 성큼 다가온 어느 출근 날, 양화대교를 가로지르는 지하철 풍경을 보다가 나는 일본 나고야행 항공권을 예매했다. 1년 전, 일본 도쿄를 다녀와서 남은 60만원으로 결제를 하고보니 20만원이 넉넉히 남았고 항공권 예매 사실을 남자친구에게 메시지로 보냈다. 급작스러운 여행제안에도 남자친구는 흔쾌히 여행에 동의해주었고, 우리는 그렇게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직장인에게 여행이란 무엇일지, 징검다리 연휴가 잦았던 10월 전 직원들의 일부가 동남아와 유럽 등지를 모두 휴가로 다녀왔다며 각종 기념품들을 꺼내어놓았다.

제가 나트랑에서 사온 과자 좀 드셔보세요 ~!

싱가포르에 다녀왔는데 마땅히 기념품이 없어서 소소하게 사왔는데 나눔하세요!

발리에 다녀와서 에센스와 과자, 티 종류를 모두 공용테이블에 두었습니다~!


모두들 여행에서 하나둘씩 사온 기념품들은 직원들과 나눔하기 위해서 공용 테이블에 올려두었고, 실시간으로 전사 채널에 공지가 올라왔다. 다들 짬을 내어 머리를 식히고 리프레쉬 차원에서의 휴가를 알뜰살뜰히 사용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부럽기도 했고, 그 모습이 ‘나도 다녀와서 무언가를 공유해야할까?’ 라는 부담감으로 다가오기도 했고, 왜 그 동안 여행을 잊어버리고 산 것인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고야로 떠나던 아침, 왠지 설레지 않는데 설레어야 할 것 같아 공항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여행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심장 박동수를 올려대는 비트속에서도 왠지 차분해지는 건 여행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공항에서 만난 남자친구에게도 한껏 끌어올린 여행의 설레임을 설명하다가 비행기 탑승과 동시에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1시간 40분, 인천 공항에서 나고야 주부 국제공항까지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눈을 떴을때 ‘아! 도착했다!’ 라는 개운함 보다는 앞으로 주어진 5일동안 내가 짜놓은 판에 내가 얼마나 적절하게 움직일 수 있는지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조급함은 오래걸리지 않아 예민함으로 바뀌었다.


공항에 도착하고, 수속을 마치고 나와 시내로 향하기 전 기차티켓을 끊는 과정부터 남자친구에게 예민함이 터지기 시작했다. 모든 계획을 짰던 나에게 남자친구는 계속해서 질문을 했다. ‘어디로 가야해?‘ ’그건 어디서 끊는거야?‘ ’그럼 기차가 먼저? 지하철이 먼저?‘ 당연한 질문이었다. 계획을 모두 내가 짰으니 남자친구의 질문은 당연했음에도 마치 미팅에 참석한 직원이 사전 내용을 하나도 읽고 오지 않은 것처럼 나는 답답해했다. 결국 남자친구와 지하철에 겨우 몸을 싣고서 잠시 숨을 돌리고 화해를 했다. 여행에서의 조급함은 여행을 망치기 일쑤다. 5일을 머무르는 동안 나는 계획형 J 인간의 면모가 업무에서만 드러날 줄 알았는데 여행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적어도 하루에 어느 곳은 가야하는데 만약 가지 못했다면 그 대안 정도는 있어야 움직일 수 있었다. 피곤했다. 여행이 아니라 출장지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왠지 남자친구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매일 저녁 2만보를 넘게 걷고도 뿌듯하게 잠이 드는 것이 아니라 거의 기절하다 시피 잠에 들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저녁, 다음 날 출근 준비를 위해서라도 5일치 빨래와 정리를 후딱 끝내니 저녁 11시가 넘었다. 정상 출근을 위해서 아직도 해야할 일들이 남았다. 정리를 마치고 침대에 눕자 자정이 넘었고 나는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조급함은 무엇이든 엉망으로 만들어놓기 쉽상이다. 그리고 그 조급함은 결국 풀리지 않는 나의 단전깊은 불안함에서 비롯한다. 여행이 매끄럽고 리프레쉬 되지 않았던 이유는 생각보다 이번 여행은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이었던 여행이었다. 그저 일상에서의 사고를 정지한 ‘휴식’ 이 필요했던 것이지 그것이 곧 비행기를 타야만 풀리는 휴식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 ‘나만의 방법’ 을 찾고 그 가짓수가 늘어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면역이 되었어야 하지만 늘 어려운 스트레스 해소와 압박감, 불안 등의 증세를 나만의 방법으로 타개할 수 있는 전략이 족히 5가지 이상은 되어야 한다. 나에게 그것은 여행은 아니었다. 그저 집 안에서 온전히 나 스스로 가구들을 옮기고 바스락 거리는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고 더 이상의 생각을 멈추도록 잠시 명상을 가지는 것. 그리고 괜찮아진다면 동네카페를 둘러보거나 잠시 서울 여행을 곳곳을 다녀오는 것 정도가 나에게 지금 필요한 [휴식] 이었다. 여행은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나에게 여행이라는 건 휴식을 위한 도피처 혹은 환기의 방법이 아니었다는 정도로 하나의 시행착오 쯤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여행지에서 얻은 새로운 공간과 사람들이 주는 그리고 나의 사람과 색다른 환경에서 서로만 아는 이야기로 깔깔대며 웃는 그 묘미는 여행이 아쉽더라도 늘 살며시 미소짓게 되는 그 여행지에서의 추억은 고스란히 남았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것이었다.


생각보다 현실로 돌아오는 건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차가운 회사 책상과 눈이 뻑뻑한 사무실 모니터를 바라보며 일을 하다보면 어느 새 ‘내가 언제 여행을 다녀왔지?’ 싶을 만큼 현실로 빠르게 돌아오는 걸 느낄 수 있다.


여행 후, 나에게 남은 것은 천엔샵에서 사온 플라스틱의 예쁜 컵과 스타벅스의 시그니쳐 머그컵 그리고 각종 조미료와 향신료. 불안함 속에서도 나의 불안함이 잠시나마 잠재워졌던 사진을 찍은 순간들. 아쉬움 속에서도 추억은 건졌고, 건져진 추억으로 다음 여행은 조금 더 여유있게 할 수 있길 바라며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