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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 Apr 08. 2020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왜 어떻게 언제까지 


쓰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던 건 11살쯤, 계기는 어쩌다 찾아온 기회에 쓰게된 글로 상을 받게 되어서, 이후로 쓴다는 것 그 자체가 좋았다.


그러나 살아온 날이 완만하지 않았던 것처럼 예상대로 이후 삶 역시 그리 말랑하지 않했다. 쓰고 싶은 날보다 죽음을 생각한 날이 많은 때가 있었다. 글쓰기라는 과제 수행을 어째서 못했는가라고 묻는다면 고난이라 이름 붙일만한 일도 있었고, 노력하지 않았고 게을렀다고 판단할만한 일도 있었다.


중학교 때는 어쭙잖은 소설을 하나 쓰긴 썼었는데, 대산문학상 같은 곳에 출품을 하려고 어쨌든 뭔가는 썼던 기억이 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제법 규모가 있는 문학상이었다. 결과는 완벽한 졸작이었다. 쓰는 일의 종착점은 소설 혹은 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어쩌다 하게 되었을까.


스물이 넘어 건축 공부를 시작한 뒤, 건축 잡지에 기고를 하거나 건축물에 대한 글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깐이지만 했다. 건축물을 창조하는 일 보다 창조된 건축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글을 좀 더 다듬고 사진을 찍으러 부지런히 다니고 이 일을 하고자 열의를 갖고 해봤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심심한 위로를 하자면, 대부분의 잡지사는 인터넷의 발달로 폐간이 되었거나 폐간이 되어가는 중이다. 블로그도 하고 있고, 브런치에도 아주 간헐적이지만 글을 쓰고 있으니 항상 가능성은 열어 둔다면 조금은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


그 다음은 영화와 드라마에 대해 쓰고 싶었고, 그래서 운영하던 블로그에는 영화 이야기가 제법 쌓여있다. 영화와 드라마 잡지도 정기적으로 구독하기도 했었다. 그 다음은 무엇, 그 다음은 무엇. 관심사가 바뀌긴 해도 결국은 기록해서 남기는 일을 하려 했다.


그러다보니 연애를 하면서는 연애에 대해 쓰고, 육아를 하게 되니 육아에 대해 쓴다. 뭐라도 쓰긴 썼다. 그러다 출판을 하려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심난한 벽을 맞이하게 된 때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 다시 '쓰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는 의미를 찾아내고 싶었다. 요약, 쓰는 일에 시들해지는 것 같아 읽었고, 다시 쓰는 일을 시작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씁니다



이사크 디네센의 문장을 무라카미 하루키가 인용했다. 쓰는 것으로 생계든, 미래든, 취미든 만들어 나가려 하는 사람이라면 꼭 기억해야 한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 쓸 것.








극단적으로 말하면 '소설가란 불필요한 것을 일부러 필요로 하는 인종'이라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 P 23


어쨌든 나는 대학 강의실보다, 혹은 동질의 사람들이 모이는 동아리 같은 곳보다, 오히려 그런 생생하고 잡다한, 때로는 무시무시하고 거친 장소에서 인생에 관한 다양한 현상을 배우고 그 나름의 지혜를 배웠다는 마음이 듭니다. P 41


아무리 바빠도, 먹고 사는 게 힘들어도, 책을 읽는 일은 음악을 듣는 것과 함께 나에게는 언제나 변함없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 기쁨만은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P 43


'어차피 멋진 소설은 쓸 수 없어. 그렇다면, 소설이란 이런 것이다, 문학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기성관념은 버리고 느낀 것,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써보면 되지 않을까'라고. P 48


언어란 원래 터프한 것입니다. 기나긴 역사가 뒷받침해주는 강인한 힘을 가진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어떤 식으로 거칠게 다루든 그 자율성이 손상되는 일은 일단 없습니다. 언어가 가진 가능성을 생각나는 한 모든 방법으로 시험해보는 것은, 그 유효성의 폭을 가능한 한 넓혀가는 것은, 모든 작가에게 주어진 고유한 권리입니다. 그런 모험심 없이는 새로운 것은 탄생하지 않습니다. P 52


소설을 쓸 때 '문장을 쓴다'기보다 오히려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에 가까운 감각이 있습니다. 나는 그 감각을 지금도 소중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P 53


'참된 작가에게는 문학상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주 많다'라는 것이겠지요. P 72


나도 인터뷰에서 상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왠지 그런 질문이 많이 들어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독자입니다. 어떤 문학상도 훈장도 호의적인 서평도 내 책을 자기 돈 들여 사주는 독자에 비하면 실질적인 의미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P 73


어디까지나 예상 차원에서 하는 얘기지만, 일일이 내 이름 옆에 그런 직함이 따라다닌다면 어쩐지 '너는 아쿠타가와상 덕에 지금까지 소설을 써왔구나'라는 것을 일부러 내보이는 모양새인지라 적잖이 번거로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P 75


내가 진지하게 염려하는 것은 나 자신이 그 사람들을 향해 어떤 작품을 제공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뿐입니다. P 77


내가 그런 내 멋대로 축이나 척도를 들고 거기에 맞춰 타인의 작품을 평가했다가는 그걸 당하는 쪽은 도저히 못 견딜 일이 될 거라는 마음이 듭니다. P 79


나는 뭔가를 생각하고 비판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시간을 많이 들여도 자주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P 82


내가 여기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건 작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격'이라는 점입니다. P 83


그것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그들의 그림이 오리지낼리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감각이 그 오리지낼리티에 동화하고 그것을 '래퍼런스'로서 자연스럽게 체내에 흡수했기 때문입니다. P 94


오리지낼리티는 그것이 실제로 살아 움직일 때는 좀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것입니다. P 97


요컨대 한 사람의 표현자가 됐든 그 작품이 됐든 그것이 오리지널인가 아닌가는 '시간의 검증을 받지 않고서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중략) 아마 지속력이나 자기 혁신력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얘기겠지요. P 99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P 110


실은 매우 단순한 얘기인데, 내 경우에는 소설을 쓰고 싶지 않을 때, 혹은 쓰고 싶은 마음이 퐁퐁 샘솟지 않을 때는 전혀 글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P 111


사람들의 마음의 벽에 새로운 창을 내고 그곳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고 싶다. 그것이 소설을 쓰면서 항상 내가 생각하는 것이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이론 따위는 빼고 그냥 단순하게. P 114


특히 젊은 시절에는 한 권이라도 더 많은 책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뛰어난 소설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소설도, 혹은 별 볼일 없는 소설도 (전혀) 괜찮아요. 아무튼 닥치는 대로 읽을 것. 조금이라도 많은 이야기에 내 몸을 통과시킬 것. 수많은 뛰어난 문장을 만날 것. 때로는 뛰어나지 않은 문장을 만날 것. P119


뭐 세상은 그렇다치고, 어떤든 소설가를 지망하는 사람이 할 일은 재빠른 결론을 추출하는 게 아니라 재료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축적해나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P 122


나에게 에세이란 굳이 말하자면 맥주 회사가 출시한 캔 우롱차 같은 것, 이른바 부업입니다. P 128


재료 그 자체의 질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거기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매직'입니다. P 129


육체적인힘과 정신적인 힘은 말하자면 자동차의 양쪽 두 개의 바퀴입니다. 그것이 번갈아 균형을 잡으며 제 기능을 다할 때, 가장 올바른 방향성과 가장 효과적인 힘이 생겨납니다. P 199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읽으면서 항상 감탄하는 점은 '이 자리에 이 인물이 필요해서 일단 내놓는다'는 땜질 식 등장인물은 거의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P 240


소설을 쓰다보면, 마치 내 마음 속을 벌거숭이로 남들 앞에 내던지는 것 같아서 상당히 창피했습니다. P 243


나를 위해서 쓴다, 라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한밤중에 주방 식탁에서 썼을 때는 그게 일반 독자의 눈에 가닿으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으니까(정말로) 대체적으로 나 자신이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만 의식하면서 썼습니다. P 259


아울러 거기에는 아마 '자기치유'적인 의미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창작 행위에는 많든 적든 스스로를 보정 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P 260


내 안에 있는 이미지를 단편적이고 감각적으로 문장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아이디어나 의식을 좀 더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문장으로 만들어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P 263


'결함 있는 인간이 결함 있는 소설을 쓰고 있으니까 남들이 어떻게 말하든 별 수 없다' 식으로 생각했고 실제로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면서 살아왔지만, P 298


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긴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단번에 팡 터진 게 아니에요. 하나하나 작품을 꾸준히 쌓아 올리며 가까스로 토대를 마련하는 식이었습니다. P 303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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