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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리 Oct 23. 2020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하는 포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가 거듭되는 일들을 반복적으로 할 때 우리는 기대를 잃어버린다.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는 사람을 맥 빠지게 만든다. 노력 여부가 클수록 느껴지는 허탈함의 체감도 크다. 이 허탈함은 크기는 자연스럽게 포기의 감정으로 나를 끌고 간다. 그도 그럴 것이 또 해야 한다는 부담감, 실패로 인한 자신감 상실, 이미 소진해버린 에너지. 이 모든 부가 요소들이 짬뽕되어 진을 탈탈 털어버린다. 상실감. 절망감. 답답함. 분노. 허탈함과 더불어 자기 비난까지도 서슴없다. 온갖 부정적 단어들이 딱 들어붙어 질척거린다. 늪이다. 이때 이 늪에 빠지면 큰일 난다. 늪에 빠져 빨려 들어가다 보면 결국 마지막은 포기다. 포기하는 순간 끝난 거다. 끝남과 동시에 내가 얻은 건 뭘까?   




<포기의 두 가지 양상>

나는 포기에는 두 가지 양상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짜 포기와 진짜 포기.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으며 때론 포기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스스로 그 '때'를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냥 내가 하기 싫어서, 힘들어서 하는 포기는 가짜 포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포기는 진짜 포기.


나를 괴롭히던 시험이 있었다.  번의 실패를   나는 좌절감이 엄청났다.  번째는 노력의 수준도  높았다. 차근차근 개념부터 다시 짚어 갔으며, 시간도 전보다 훨씬 많이 들이부었다. 스스로도 꽤나 집중하면서 공부를 하였다 생각했고, 한번 해본 개념이라고 전보다 내용도, 새로움을 이겨낼 펀더멘탈도 훨씬 안정적이었다. 그런데 행동에서 끝까지 가는 뒷심이 살짝 부족했다. 매일 정해놓은 목표치의 공부량에서 마지막에   개념 정도는 넘겼고,  정돈   봐도 되겠지? 라며 스리슬쩍 빼먹었던  노력의 결과는 결국 1점이라는 차이를 만들어 냈다. 1점으로 이번에도 패스하지 못하였다.


들였던 노력이 꽤나 컸던 터라 은근 기대도 있었는데 하다 못해 점수차라도 확 나면 이 구질구질한 기분을 그래 라고 단념하겠건만 1점이라니? 이건 무슨 하늘의 시험인가?



어쩜 이럴까. 노력이 결과와 상응하지 않는 건지,
내 노력이 결과만큼 엔 미치지 못한 건지.



확실한 건 그때 그 순간의 기분은 딱 패닉이다. 이 단어가 딱 적절하다.





그런데 말이다. 오늘 나는 확신했다. 후자인 걸로. 1 차이의  뜻은 결국 나의 노력이 결과에 미치지 못한 거였던 걸로. 결국 나는 그 시험을 패쓰 했다. 1 차이가 너무 억울해서, 화가 나서, 고작  1점에 내가 지는  싫어서. 그래서 포기할  없었다.  좋은 성적을 받아  좋은 결과를 만들어라는 하늘의 뜻으로 멋대로 정의하곤 뭐가 문젠지 되짚었다. 그리곤 알았다.




내가 결과를 못 이룬 건 결국 나의 현재 능력이 그 일에 대해 하회했던 거고, 내가 그만큼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로 나의 현재 능력과 목표치의 간극을 재야 했고, 내 노력은 과연 임계점을 돌파할만했는지를 따져야 했다.



그랬다. 처음 접하는 분야는 새로워 내가 새로운 임계점을 돌파하지 못하면 내 능력치가 기준을 하회한다. 그렇기에 몇 번의 반복으로 익숙하게 만듦이 당연했던 거고, 임계점 돌파를 위해 그 과정에서 스스로 가슴에 손을 올려 너 정말 이게 니 노력의 최선이야?라고 질문했을 때 응!이라는 대답이 나올 수 있을 만큼의 노력이 필요했던 거다. 그러니 연속으로 실패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연속적 실패 덕분에 계속적 노력, 전보다 더 많은 노력을 들일 수 있었고 익숙해져 비교적 쉬워지는 개념은 결국엔 임계점을 돌파시켜 보상을 주었다.

 



경제학에 기회비용이란  있다. 내가 무언가를 얻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을 일컫는다. 포기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는 것만을 말하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이루기 위해 나머지 좋은 것들을 포기하는 것도 포기다. 나는  읽는 시간을 줄여 공부에  투자했다. 하루 일과에 시간은 한정적이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정된 시간을 제외하고 내가 자유로이   있는 시간을 포기하여 원하는 결과를 위해 무던히 걸어가는 . 그것은 비용이  수도 있고, 내가 너무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잠시 미룸에 있을 수도 있으며, 사람들과 만남을 줄이는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을 '진짜 포기'라고 부르고 싶다.



포기는 설탕같다. 설탕은 달다. 편하다. 당장 나를 위로해주고 숨이 트이게 해 준다. 그러나 곧 감싸는 기분 나쁜 혈관의 끈적임들, 높아진 인슐린 덕에 연이어 다른 달달한 나쁜 음식을 찾아 나서는 뇌는 나를 괴롭게 한다. 설탕으로 보상체계가 잘못 들어서게 되면 벗어나기 또한 힘들다. 결국 끝까지 안 했기에 결과적으로 행복하지 않았음은 옳았다. 당장의 편리함과 미래의 행복을 바꾼 대가는 톡톡하다. 매 순간 설탕이 아닌 미래의 가치를 선택하는 것은 지겹고 힘들다. 하지만 미래 가치는 설탕보다 몇 배에 달하는 보상을 준다. 결국 인생은 전력을 쏟은 만큼 언젠가 그에 응하는 답을 해준다.

 


오늘의 반달


<내가 배운 것들>

1. 무언가 얻으려면 임계점을 돌파시켜야 한다. 결국 100%를 얻기 위해선 120%의 노력을 들이부어야 한다.

2. 새로움 앞에 매번 임계점을 마주칠 거고, 매 순간 임계점을 마주 한다는 건 우상향 하는 곡선에 놓였다는 거다. 고통 속에서 결국 임계점을 넘는단 건 상향하는 성장만 있는 거다.

3. 그래서 결국 끝까지 해내는 펀더멘탈을 길러야 한다.



새로운 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거니깐. 그냥 매 순간 그냥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그러니 그냥 계속 하자. 인생의 변곡점에선 항상 나를 괴롭히는 것들이 생겨나지만, 그렇기에 변곡점이 가치 있다. 고통은 성장임을 다시 한번 온 감정으로 되새겨 본다. 장미과의 낙엽교목인 매화는 겨울을 이겨내고 기어코 꽃을 피운다. 꽃을 피워 봄을 알린다. 결국 봄의 찬란함은 겨울 뒤에 온다. 그 겨울의 고통은 겪음으로만 알 수 있다. 매화의 겨울이 어땠을진 매화만이 알 수 있다. 겪음으로 온몸에 밀어 넣자. 밀어 넣고 느끼자. 고통을 기본값으로 여기며 무던히, 늘 있는 일인 듯 당연하듯 고통 속을 걸어 나가자. 오늘도 나는 이런 나의 삶을 사랑하련다.


니체


He who has a why to live can bear almost any how.

살아갈 이유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떠한 삶의 방법도 감당할 수 있다.


-Friderich Nietzsche(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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