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의 '이유 있는' 리더십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by 미리

2020.10.25. 별 하나가 졌다.



1942년 1월 9일 - 2020년 10월 25일.

이젠 이건희 회장을 초록색 창에 치면 출생 옆에 붙은 '사망'이란 두 글자와 함께 인물정보가 나타난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대한민국 일등 기업인 삼성그룹의 회장으로, 아버지인 이병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삼성을 이끌면서 코리아라는 두 글자보다 삼성전자라는 이름을 먼저 알릴 정도로 이건희가 경영하는 동안 삼성전자는 매출, 영업이익, 시장점유율 등에서 매우 큰 성장을 이루었다. 그만큼 이건희의 통찰력은 대단했고, 한 나라를 선진국 반열에 올릴 만큼 절대 운 따위로는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 있는 인재였다.




이건희 회장 인물정보



이건희의 리더십


삼성전자를 지금의 글로벌 기업으로 이끌어낸 이건희 회장의 업적을 뽑으라면 단언컨대 이 두 가지일 것이다.


1. 반도체

"디지털 시대 1년의 변화는 아날로그 시대 100년의 변화에 맞먹는다"


이건희 회장의 업적을 나열하자면 반도체가 일위일 것이다. 실질적으로 삼성을 세계 반열로 이끌어준 핵심이 바로 이 반도체 사업이다. 인텔과 컬컴이 독보적으로 차지하고 있던 반도체 시장에서 해성처럼 등장하여 점유율 1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인텔과의 다툼에서, 2012년 대망의 1위로 등극하였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의미냐며 연간 50조 원의 매출을 내고, 한국 GDP의 거의 20%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 반도체 사업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1위 자리를 내주지 않는 최강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83년, 삼성의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증기기관 하나로 세계를 제패한 영국처럼
우리도 반도체로 세계 정상 못 오르겠나



당시 우리나라는 국민소득 2000불을 갓 넘긴 말 그대로 후진국에 속했다. 또한 반도체 기술을 배우기 위한 환경도 녹록지 않았다. 농업국에서 산업국으로 전환하던 시기였기에 미래산업보단 당장의 경제에 이바지하는 사업이 필요했다. 또한 당시 한국 반도체 공장은 트랜지스터를 생산하는 수준으로 해외 반도체 기업들과 비교해 기술력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기술을 배워오기도 녹록지 않아 더더욱 '현실 불가능'하다는 각종 비웃음과 질타를 받았다. 그러나 이 회장은 끊임없이 부친을 설득하는 동시에 삼성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불가능하게만 보이던 꿈을 현실로 만들어 냈다.



시장에 뛰어들면서 처음으로 부딪혔던 난관은 주문형 반도체냐 메모리 반도체냐의 문제였다. 당시 부족한 기술력으로 주문형 반도체를 먼저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희 회장은 지금 이 반도체 산업이 삼성전자뿐 아니라 전자 산업 '전체'의 핵심이 될 거라는 큰 그림을 보았고, 과감하게 메모리 반도체를 택하였다. 또한 D램과 S램 중 시장 진입은 쉽지만 정체된 S램 대신 시장 규모도 크고 경쟁이 치열하지만 발전 가능성이 높은 D램을 또 한 번 과감하게 선택한다. 이건희의 강력한 신념과 기업가로서의 결단력, 선택에 대한 지체 없는 추진력, 전체를 그릴 줄 아는 선경지명을 엿볼 수 없으래야 없을 수 없다.


64M D램의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 등록


후에도 기술 격차 극복을 위해 직접 미국 실리콘밸리를 방문해 핵심 인재를 영입하고, 당시 반도체 사업을 주도하고 있던 페어차일드에게 삼성전자 지분 30%를 주고 기술 이전받기에 성공하였다. 이후 ICII가 들고 있던 한국 반도체의 잔여지분 50%를 인수하여 삼성 반도체로 상호를 변경 후 본격적인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었다. D램 양산을 목표로 기흥공장을 준공하기 시작했다. 이때 경쟁사들은 이미 64K D램 개발 완성 단계에 접어든 상황이었고, 시간이 없었지만 삼성은 포기하지 않았다. 경영진, 기술진, 근로자 연인원 26만 명을 투입하여 쉴 새 없이 건설작업으로 평균 2년이 걸리는 공자를 단 6개월 만에 완공한다. 그와 동시 개발에 들어간 D램은, 미국과 일본이 최소 6년 이상의 연구개발을 거쳐 완성한 그 D램을, 생산, 조립, 검사까지 모든 공정을 완벽히 거쳐 6개월 만에 개발하게 된다. 1983년 12월. 삼성전자의 역사적 순간을 맞이하였다. 64KB D램을 자체 개발. 이로서 삼성전자는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를 크게 좁혔고, D램은 그간 투입한 자원보다 더 많은 수익을 가져다주는 업적을 남겼다.


1999 256 D램 세계최초 개발


그 후로 이 회장은 멈추지 않았다. 안주하지 않았다. 당시 시장 주류였던 6인치 웨이퍼에서 8인치 웨이퍼 구축을 지시, 64기가에서 256메가바이트, 1기가바이트 D램까지. 초격차 기술을 구현하여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경쟁력을 만들었다. 무어의 법칙을 주도했다. 이건희 회장의 통찰력이 없었다면, 강력한 신념이 없었다면 이 불가능한 신화를 현실로 만들 수 없었을 거다.



2. 1993 신경영 선언


프랑크푸르트 경영혁명 당시 이건희 회장


"1등 제품은 시장점유율뿐만 아니라 질적 가치, 수익력, 브랜드 이미지가 모두 세계 최고여야 한다"


1990년 이전 기업의 목표는 오로지 작년보다 얼마나 더 많은 제품을 생산/판매할 수 있나 였다. 당장 눈앞의 많은 양, 많은 판매에 급급하며 질로서 얻을 수 있는 장기적 관점(부가가치, 장기 생존, 시너지 효과 등)은 소홀한 채 더 많은 나무를 심기 위해 숲을 헤치고 있었다.


이때 이건희 회장은 1993년 2월 미국 LA에서 전자부문 수출상품 현지 비교 평가회의에 참여하게 된다. 운명의 뜻이었는지, 이건희 회장을 시험하기 위함인지 현장에서 직접 삼성이 자부하여 만든 제품이 고객으로부터 외면받아 한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는 걸 목격했다. 눈 앞에서 자사의 제품이 3류 취급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본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란 이름을 반환해야 한다. 한쪽 구석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것에다 왜 삼성이란 이름을 쓰는가? 그나마 진열대에 놓여 있는 제품 중에는 뚜껑이 깨져 있거나 작동이 안 되는 것도 있지 않은가? 이는 주주, 종업원, 국민, 나라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통탄했다 한다.



이대로라면 삼류로 전략하여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감지한 이 회장은 1993년 6월 4일 일본 도쿄에서 삼성의 경영 현장을 지도해 온 일본인 고문들과 삼성이 지닌 문제점들에 대해 회의를 가졌다. 이때 삼성전자 정보통신부문 디자인 부서를 지도했던 후쿠다 고문이 내놓은 보고서엔 삼성의 약한 상품기획력, 오래 걸리는 개발 시간, 물건을 내놓는 타이밍 등이 미흡하단 내용들이 기재되어 있었고, 이런 사항들은 그동안 이건희 회장이 숱하게 지적해오던 내용이었다. 도쿄에서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기내에 동승했던 사장단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논의하게 했다. 1993년 6월 7일 마침내 이건희 회장은 임원과 해외 주재원 등 200여 명을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로 불러 모아 새로운 삼성을 여는 회의를 주최했다.


“삼성은 이제 위주의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


삼성 신경영을 선언했다.



오랫동안 전해오던 관습을 바꾼다는 건 양날의 칼이다. 꿈을 품고 앞으로 펼쳐진 새로운 비전과 희망을 바라봄에 설레기도 하지만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익숙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걸어간다는 건 엄습해오는 책임감과 불안감과도 마주쳐야 한다는 이질적인 것이다. 이건희 회장 스스로도 그 선택의 순간에서, 혼돈 속의 질서를 만들기 위해 사생결단의 마음이었을 거라 감히 생각해본다.


이건희 회장은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았다. 사장단 회의와 여러 선진국들을 둘러보면서 삼성 스스로가 변하지 않으면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변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고, 모든 익숙함을 버린채 기업과 나아가 나라를 건 운명을 쥔 엄청난 압박감에도 불구하고 새로움을 선택했다. 그리고 과감했다. 생산라인까지 중단시키며 불량품을 낮추기 시작했고, 양질 전환 선언 후에도 무리하게 완제품 생산을 추진하다 생겨난 불량품에 무조건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는 조치는 물론이거니와 수거한 불량품을 임직원들이 보고 있는 눈앞에서 태워버렸다. 50억에 달하는, 본인들 손으로 힘들게 만든 제품이 타들어가는 모습을 본인의 두 눈으로 똑똑히 시켜보는 임직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건희 회장은 불량품과 함께 임직원들의 태도까지도 바꿔 버릴 정도의 과감함을 보였다. 이렇듯 이건희 회장은 변화 앞에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대담함이 있었으며 자신의 신념에 일말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확고함을 몸소 보여주었다.



깃발 그리고 이건희 회장


이토록 '이유 있는' 인재인 이건희 회장. 물론 삼성을 지켜내는 과정에서 여러 부도덕한 일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이 있었기에 한국이란 나라가 세계 위로 쏟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구든 부정할 수 없는 팩트이다. 리더의 덕목엔 많은 것들이 들어있다. 좋은 리더가 좋은 팀을 만들고, 좋은 팀은 좋은 결과를 만든다. 그 결과들은 직/간접적으로 개인에게서 개인에게로, 개인에서 집단으로, 기업에서 나라로. 더 나아가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는 연결고리를 선사한다. 이건희 회장은 리도로써 누구보다도 저명했다. 이런 이 회장이 보여준 리더의 덕목으로 3가지를 꼽고 싶다.


1.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내다보고 끝까지 추진시킨 선경지명.


2. 막대한 금전적 손실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생산라인 중단, 애니콜 전량 리콜 등의 자신의 결정에 대한 확고한 태도.


3. 직접 경영에 발로 뛰며 참여하고, 생각하며, 생각한 것들을 현실로 옮기는 행동력.


혁신은 누구도 못할 거라 생각했던 일을 택했기에,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갔기에 일어난다.



개척자이자 야망가. 한 기업의 강인한 리더이자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소명을 다한 이건희 회장.

죽음 앞에 빛을 잃는 인간의 생에 죽어서도 빛을 남긴, 눈감는 그 순간 주마등처럼 스쳐갈 인생이 더할 나위 없이 아쉬우나 아름다운. 이건희 회장의 인생의 대단원은 인생의 소명을 다 했음에 틀림없다라고 감히 추측해 본다. 이건희 회장의 인생의 마지막이자 대단원인 3막은 이렇게 내렸다.


천상병 시인의 소풍이 생각나는 밤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 소풍



감사하고 당신이 있음으로 한국이 빛났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참고>

[엑설런스 코리아] 삼성 만든 프랑크푸르트發 경영혁명 - 이건희 삼성 회장 신경영 선언 20년

https://blog.naver.com/excellceo/6019610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