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보잘거 없어 보일 때 힘내라고 말해주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

by 미리


유독 계절의 향이 나는 기억들이 있다. 산뜻한 봄내음의 넘치는 설렘과 따뜻함의 냄새. 눈부시고 쨍한 여름의 열정적인 냄새. 살짝 시리는 코끝에 쓸쓸하나 그래서 잔잔한 가을의 냄새. 날카롭지만 포근함과 안락함이 공존하는 겨울의 내음까지.


드라마에도 유독 이 내음들이 나는 드라마가 있다. 2020년의 마지막을 남겨둔 12월. 영하 10도를 웃도는 추위에 사무치면서도 집으로 들어와 전기장판을 켜놓은 이불에 들어가 있노라며 그렇게 따듯할 수 없다. 밖에서 짊어지고 온 모든 지침을 한순간 녹여버리는 기분에 몽롱해지기까지 한다. 귤까지 까먹으면 금상첨화인데 누구나 떠올리는 겨울의 이미지일 것이다. 여기 이런 드라마가 있다. 겨울의 내음이 유독 강하게 뿜어져 나와 너무 춥고 시린데 쏙 하고 들어간 전기장판 안처럼, 추위 속 안락함까지 가지고 있는 그런 드라마.





나의 아저씨


언제나 그렇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나의 관심 안에 있을 때만 신경의 대상이 된다. 둘도 그랬다. 그저 같은 회사, 같은 부서에서 동훈은 부장으로 팀을 이끌어 가고 있었고 지안은 계약직으로 잡다한 업무를 맡고 있었다. 서로 양 극단의 직위에 있는 둘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동훈에게 전달된 5천만 원의 돈뭉치로부터였다. 5천만 원의 돈뭉치가 촉매제가 되어 둘은 이상하게 자꾸 엮인다. 그리고 이상하게 자꾸 서로가 신경 쓰인다. 그렇게 둘은 진행되는 사건사고 속에서 서로를 알아간다.




회사에서 양 극단에 있는 직위처럼, 사회적 기준이 원하는 대로 좋은 대학을 가서 좋은 기업에 들어가 부장 자리에서 높은 연봉을 받고 변호사 아내와 결혼하여 순탄대로를 걸으며 제삼자가 볼 때 번듯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동훈과, 6살부터 할머니와 둘이 남겨져 사채빚에 시달리며 자신과 할머니를 괴롭히는 사채업자를 충동적으로 살인하고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살인전과라는 주홍글씨를 달고선 여전히 엄마가 남겨놓은 사채빚을 갚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하고 먹고 자고 하루하루를 말 그대로 버텨내고 있는 지안. 청각장애가 있는 할머니를 홀로 남겨놓을 수 없어 죽을 수도 없는 겨우 21살의 지안은 누가 봐도 불쌍하고 딱하다.


이렇게 제삼자가 볼 때도 너무 달라 보이는 둘의 상황이고 겉으로 봐서는 누가 봐도 지안은 불쌍한데 동훈은 괜찮아 보인다. 동훈에게 일어나는 일들(대학 후배가 윗 상사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는, 그것도 모자라 후배는 동훈의 와이프와 바람을 피우고, 동훈을 자르려 호시탐탐 노리는. 3형제의 형편을 모른 척할 수 없어 도와주는 등)은 지안에 비하면 그럴 수도 있지 정도로 치부하는 게 좀 당연한 거 같다.


그러나 아픔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들의 고단함과 슬픔은 그저 보이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온몸으로 밀면서 밖으로 모든 걸 내뿜어 표출하는 지안의 아픔과, 묵묵히 속으로 삼키며 내적으로 자꾸만 밀어 넣어 암세포처럼 스스로를 잠식시키는 동훈의 아픔은 그냥 보이는 방식이 달랐을 뿐 각자에겐 똑같이 아픈 거다. 그런 둘이 서로를 알아가며 위로를 받는다.



동훈이 지안을 알게 됐을 때


퇴근하면서 탕비실에 놓여있는 커피를 한 뭉치 쥐어 넣고 나가는 지안을 모습을 봤을 때


'헤어져. 쌔고 쌘 게 남자인데'

선글라스를 쓰고 회사로 출근한 지안이 멍 투성 이인걸 알았을 때

'어디 살아'

'초등학교 뒤요'

'맞아요 엄청 후진 동네'

'아버지는 뭐 하시고?'

'아저씨 아버지는 뭐 하세요? 난 아저씨 아버지 뭐하시는지 하나도 안 궁금한데 왜 우리 아버지가 궁금할까?'

'아 그냥 물어봤어'

'그런 걸 왜 그냥 물어봐요? 잘 사는 집구석인지 못 사는 집구석인지 아버지 직업으로 간 보려고?'

준영과의 계약을 성사하기 위해 오천만 원 사건을 빌미로 동훈에게 한 달간 밥을 사랑한 지안에게 밥을 사주면서 대화할 때


달이 보고 싶다는 할머니를 위해 카트를 훔쳐가는 지안을 봤을 때


'고마워 때려줘서'

술자리에서 자신의 험담을 한 동료의 뺨을 지안이 때린 걸 알았을 때


'파이팅..!'

지안이 처음으로 동훈에게 긍정의 말을 해주었을 때


지안이 자신과 할머니를 괴롭히는 사채업자를 죽인걸 알게 됐을 때



지안이 동훈을 알게 됐을 때


우연히 준영과 같이 탄 엘리베이터에서 울리는 준영의 불륜용 휴대폰의 벨을 꺼주며 그때 찍힌 전화번호가 동훈의 와이프의 번호가 같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부장님 근데 이지안 씨는 왜 그만두라고 하신 거예요?'(막내)

'개 겁나 싸가지야'(김대리)

'그만하자, 쪽팔린다. 남자 넷이 앉아서 여자애 하나 씹고 있고.'(동훈)

'별일 아니야. 너희들은 걔 안 불상하냐?'(동훈)

'뭐가 불쌍해요 그런 싸가지가.'(김대리)

'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해. 살아온 날들이 말해주잖아. 상처 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그게 보여. 그래서 불쌍해. 걔의 지난날들을 알기가 겁난다.'(동훈)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동훈을 자르려는 준영과의 계약을 성사하기 위해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동태를 파악하던 중 술자리에서 자신의 얘기를 하는 걸 들었을 때

'착하다'

할머니에게 달을 보여주고 돌아가는 길 그저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을 기다리는 동훈을 봤을 때


'나 같아도 죽여'

지안이 살인했다는 소리를 듣고도 처음으로 자신의 편을 들어준 동훈.



이런 둘이 서로를 알아가면서 서로가 딱해서, 서로가 아파서, 그래서 서로가 자신 같아서. 아픈 게 서로 같아서. 그래서.


네가 불쌍하니깐 너처럼 불쌍한 나 끌어안고 우는 거야.

우린 둘 다 자기가 불쌍해요.





고작 21살에 삶의 아픔을 너무 빨리 알아버린 지안이, 꿈도 미래도 희망도 없는 지안이, 그게 무서워 스스로를 가두고 벽을 치며 사람들과 자꾸 멀어지려는 지안이 동훈을 만나 처음으로 나도 사람답게 살 수 있겠다, 나도 사람대접받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고, 겉으로 남부러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동훈은 자신의 속을 알아버린 지안이 자신을 감싸주는 걸 보며 고맙고 짠하다.

둘은 말없이 아픔을 공유하며 그렇게 서로를 위로해준다.

'좋은 사람이에요 엄청.'


'네 번 이상 잘해준 사람.'


어딘가엔 있을법한 지안과 어디에나 있는 아저씨 동훈은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다. 아니 우리는 각자 각자의 삶을 무게를 짊어지고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짊은 정도의 깊이가 다르고, 창발 되는 형태가 다를 뿐 누구의 무게가 크든 작든 깊든 얕든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감당하는 존재가 나인데. 인생을 살다 보며 크든 작든 늘 나를 괴롭히는 요소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런 요소들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관통하여 마음을 한없이 추락의 끝으로 데려간다. 그럴 때면 아무것도 하기 싫다. 희망도, 미래도, 꿈도 순식간에 잠식당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당장 내 마음쯤이야 어떤들 삶은 흘러간다. 살기 위해선 어쨌든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우울은 가만히 내버려 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우울증의 특효약이 바로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이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라도 좋다. 상대가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상관없다.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잠식된 감정은 충분히 밖으로 빠져나간다.


지안과 동훈도 그랬다. 비록 직접적 전달은 아니었지만, 여러 정황들이 둘이 서로를 알아버리게 만들었고, 둘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서로에게 내비치면서 서로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의 아픔과 그 아픔을 다루는 각자의 방식을 보며 서로가 안됐고, 딱하고, 슬프지만 또 그게 자신 같아서 위로를 받는다. 희망을 조금씩 되찾고, 웃음을 지으며 사람답게 살아가며 인생을 감내하고 싶어 진다.


우리도 그러자. 커다란 원으로 한없이 돌지만 높낮이가 매번 바뀌는 인생의 회전목마 속에서 현실에 치여 고단한 몸을 이끌고 돌아오는 퇴근길이지만, 뭐하며 먹고살지 하루하루가 걱정이지만, 당장 생계에 치여 하루하루가 버거운 현재이지만, 혹은 인간관계 앞에 근심일지라도. 그게 뭐든 무미건조하고 답답한 현재가 언제나 삶이 당신을 옥죄어 오더라도 회전목마의 높낮이가 바뀌듯 모든 긍정의 감정과 부정의 감정은 오르고 내린다. 그러니 뭐가 되든 좋다. 글이든, 영상이든, 라디오든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들을 보고 들으며 공감하고 감정 이입하고 눈물지으며 한없이 밖으로 마음을 쏟아내자. 부정의 감정이 다시 채워질지 언정 그 순간만은 탈탈 털어 쏟아내자. 그리고 평온함에 이르자. 힘내?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 공감을 할 대상만 있음 된다. 감정을 끄집어 쏟아낼 매개체만 있으면 된다.


지금 힘들고 지쳐있는 모든 지안과 동훈들에게, 감정을 끄집어낼 필요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잘 닦여진 이 드라마 한 편 어떤가?




주인공뿐만 아니라 조연들의 각자의 이야기도 어디에나 있을법하고 누구나 느껴봤을 감정들에, 조연들에게도 짠해지며 마음이 가는 드라마다. 이만 때쯤 분위기와 함께 늘 생각나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 제목 때문에 질타도 받고 타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좋은 작품은 언제나 수면 위로 떠오른다. 겨울이 넘어가면 봄이 오듯 영원히 쌓일 것 같은 겨울도 녹아내리는 날이 온다.


답답함에, 우울함에 털어내고 싶은데 어쩔 줄 모르겠을 때 그 감정을 꺼내 넘치게 해 줄 수 있는 드라마. 눈물이 차 올라 한없이 울어볼 수 있는 드라마.

현실이 너무 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따듯함을 보여주는 드라마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위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그 위로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는 드라마.

지안과 동훈이 나 같아서, 그래서 나도 위로받는 드라마.

그 둘이 그랬듯 나도 힘을 내고 싶은, 살아가고 싶게 만들어주는 드라마.

나도 누군가에 편이 되어주고 싶은 드라마.

어른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해 주는 드라마.


내 인생이 너무 보잘것없어 보일 때 힘내라고 말해주는 드라마.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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