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니랜드>(2017)
태초에 영화는 ‘빛’과 ‘어둠’에 의해 태어났다. 빛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림자가 있고,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어딘가에 빛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모든 이미지들은 빛과 어둠에 의해 생명력을 얻는다. 이 사실은 영화가 탄생부터 세상의 ‘밝음’과 ‘어둠’을 담아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음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허니랜드>는 인류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빛’과 ‘어둠’으로 대변되었던-자본주의 하의 대량생산 시스템과 자연 속에서 전통을 지켜나가는 삶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며 질문을 던진다.
환경학자이자 사진작가인 루보미르 스테파노보는 자연보존에 관한 유엔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마케도니아의 외곽에서 야생벌과 함께 전통적인 양봉법을 사용하는 사람에 대해 듣게 된다. 그 이야기에 매료된 루보미르는 또 한 명의 젊은 여성 감독 타마라 코데브스카과 함께 마을을 찾아 나서게 되고, 동화 같은 이야기로 세계인들의 마음을 울리며 선댄스 영화제 3관왕을 수상한 영화 <허니랜드>(루보미르 스테파노보, 타마라 코데브스카, 2019)의 주인공 ‘아티제’를 만나게 된다. 50세의 중년 여성 아티제는 전기가 없는 것은 물론 먹을 물도 충분치 않은 고원지대에서 양봉일을 하며,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아티제가 꿀을 채취하는 방식은 고전적이며 자연적이다. ‘반은 내가, 반은 너희들이’라고 말하며, 언제나 벌들이 살 수 있을 만큼의 꿀을 남겨놓고 자신의 몫을 가져간다. 아티제의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는 ‘자연’과의 ‘공생’이다.
영화는 아주 적은 컷만을 이용하여 꿀을 양봉하는 아티제의 모습을 보여준다. 넓은 들판을 지나 계곡을 오르는 아티제의 모습은 대자연에 속한 인간을 보여주는 듯 원거리 촬영을 통해 아주 작게 표현된다. 아티제는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돌보고, 특별한 대화도 없이 펼쳐지는 이 시간들은 이미지만으로 따듯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티제의 옆집에 7명의 자녀를 둔 후세인 가족이 이사를 오며,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던 작은 마을의 고요가 깨지기 시작한다. 아티제는 멀리서 요란한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그들의 모습을 숨어 조용히 관찰한다. 이후 아티제가 후세인 가족에 관심을 보이고 그들과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이야기가 변화한다. 두 가족은 사이좋은 이웃처럼 아이들과 라디오를 함께 듣기도 하고, 술을 나눠 마시기도 한다. 후세인 가족은 수십 마리의 소를 키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티제의 양봉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아티제는 그들에게 아무런 요구 없이 자신의 노하우를 알려주며, 자신이 그동안 지켜온 온 벌들과의 약속을 전한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더 많은 꿀을 생산하면 후한 값을 쳐주겠다는 보스니아인의 꼬임에 넘어간 후세인은 아티제의 조언을 무시한 채, 벌들을 혹사시킨다. 그리고 벌처럼 그의 아이들 역시 노동과 벌의 쏘임에 의해 혹사당한다. 아티제는 후세인의 행동을 보고 큰 실망과 분노를 표출하지만, 이미 벌들은 모두 죽어버린 후다. 갑작스러운 후세인 가족의 등장과 연이은 사건들-마치 픽션영화의 시놉시스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현실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어떻게 이렇게 픽션처럼 완벽한 구조를 가질 수 있었을까.
총 1시간 30분의 러닝타임을 가진 <허니랜드>는 3막 구조를 가지고 있다. (후세인 가족의 등장 전 아티제의 생활-후세인 가족의 등장과 변화-후세인 떠난 후 아티제의 생활) 이 구조를 가능하게 한 가장 큰 요소는 3년 동안 진행된 약 400시간의 촬영이다. 제작진들은 아티제가 사는 마을로의 접근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적은 장비와 스탭을 꾸려 일주일에 4일 정도를 캠핑하며 촬영했다고 한다. 후세인 가족이 나타나고서부터는 두 팀의 촬영팀이 아티제의 집과 후세인의 집을 동시에 교대로 촬영해 ‘동시성’을 확보했다. 또한 아티제가 5개의 현지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는 대부분 대화가 아닌 액션과 이미지를 위주로 촬영되고 편집되었다. 덕분에 이 영화는 인터뷰와 내레이션이 없는 전형적인 다이렉트 시네마의 구성을 취하게 된다.
촬영에서 특징점 두 가지는 ‘자연광’의 활용과 인물의 ‘얼굴’이다. 아티제와 그녀의 어머니가 머무는 아주 작은 방에서 빛은 극대화된다. 그곳의 유일한 광원은 낮에 창으로 들어오는 빛과 밤에는 아티제의 촛불뿐이지만, 촬영팀은 별도의 조명을 사용하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촬영한다. 촬영팀이 개입한 것이 있다면, 흐린 날씨에 부족한 광원을 보충하기 위해 천장에 화이트보드를 대어 그림자의 디테일을 보완한 정도다. 이는 자연광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18세기 네덜란드 화가(대표적으로 렘브란트)들의 그림을 참고한 결과로 보인다. 이 영화의 촬영감독 어빈 커쉬너는 “인간의 얼굴 풍경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없다”라고 말한다. 이 역시 자화상을 주로 그렸던 렘브란트의 영향으로 보이며, 때문에 아티제의 얼굴은 이 영화의 이야기 자체로 기능한다. 그녀의 얼굴은 우리가 결코 만나지 않을 누군가의 삶에 대해 들려주고, 우리가 결코 방문하지 않을 곳으로 데려다주고,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 환경 및 사회적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영화는 Nikon 810과 800, D5와 줌 렌즈(2470mm, 일부 장면의 경우 8400)로 촬영되었으며, 일부는 Canon이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Osmo와 드론을 사용했지만, 이후에 모두 헨디헬드로 변경하였고, 작은 방 장면은 모두 픽스로 촬영되었다.)
후세인 가족이 떠나고 돌봄의 대상이자 한편으로는 의지의 대상이었던 아티제의 엄마가 세상을 떠난다. 곧 봄이 올 것이라는 따듯한 믿음도 잠시, 칠흑 같은 어둠과 칼날 같은 겨울바람이 아티제의 집을 덮친다. 홀로 남겨진 중년의 아티제는 후세인 가족이 남기고 간 라디오를 이리저리 돌리며 세상과 주파수를 맞추려 노력한다. 그리고 봄이 오자, 아티제는 언제나처럼 절벽을 오른다. 모두가 떠난 그 시간 그 자리에서 언제나 자신을 기다려주었던 자연에게 돌아간다.
우리는 보통 높고 가파른 절벽, 용솟음치는 화산, 수십 미터의 빙하 등 보통 엄청난 규모의 자연경관이나 현상을 볼 때 느끼는 경외감을 일컫어 ‘숭고하다’라고 말한다. 분명 ‘숭고’란 ‘인간’을 넘어서는 어떤 거대한 무엇을 목도할 때 느끼는 정서에 가깝다. 만약 인간에게서 ‘숭고’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어떤 경우일까. 짧은 시간 아티제의 삶을 돌아보며, 인간에게서 느낄 수 있는 숭고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지 않을 때’ 생긴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감독이 아티제를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 아티제는 “언젠가는 당신들이 나를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운명 같은 만남을 영화는 긴 시간의 힘으로, 빛과 어둠으로 조각해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티제의 삶은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 ‘받아들여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유들을 오래 지속하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둠 속에서 촛불처럼 작게 타오르고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보낸다.
․ 참고(인터뷰 인용)
https://nofilmschool.com/honeyland-documentary-interview
http://moveablefest.com/tamara-kotevska-ljubomir-stefanov-honey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