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의 크고 확실한 행복, 마사지
어렸을 적 ‘엄마 손은 약손’의 기억을 시작으로 마사지받기가 취미가 되었다. 코로나가 어서 끝나 전 세계 마사지 단골집 지도를 만드는 게 꿈이다. 스리랑카, 영국, 인도, 부탄을 거쳐 네팔에서 살고 있다. 남아시아에서 기후변화와 농업, 재난경감을 연구한다.
최근 작 <우리는 부탄에 삽니다> - 2022년 8월 25일 출간, 공명 출판사. 2022년 우수문학콘텐츠 수상작.
나는 어릴 때 자주 체했다. 비유도 약했고 장염 또한 달고 살았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자동차를 타고 외출할 때면 자동차 안에서 토하는 게 일상이라 항상 세숫대야를 가지고 차를 탔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고 처음으로 샀던 아빠의 차, 소나타에서도 나는 자주 먹은 것을 게워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는 차를 비롯한 모든 탈 것만 타면 멀미를 한다.
나의 최초의 위 내시경의 기억은 내 나이 12살 때였다. 그 당시 나는 이유 없이 자주 체했고, 그 정도가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로 심해지자 나는 엄마 손을 붙들려 동네 의원에 가서 위 내시경을 했다. 수면마취도 없을 당시, 맨 정신으로 했었던 위 내시경은 12살의 나에게 커다란 트라우마를 가져다주었다. 그 당시 나의 병명은 경미한 스트레스성 위염. 심하지 않은 염증이었고, 뚜렷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으니 스트레스성이라 명명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에게는 예민한 아이라는 설명이 뒤따라 왔다.
아주 어렸을 때, 높은 열에 끙끙대면서 배가 아프다며 거실 소파에서 누워서 울던 기억이 난다.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던 기억도 생생한 것이 아마도, 그때도 장염에 걸렸던 것 같다. 그때 누워있던 어린 나의 배를 따스하게 문질러주던 엄마의 손이 기억난다. 엄마는 ‘엄마 손은 약손’이라는 구절을 마치 기도처럼 나지막이 읊으며 나의 배를 시계 방향으로 둥글게 둥글게 만져주곤 했다. 그게 나의 생의 첫 마사지의 기억이 아닐까?
그러고 나서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인생 처음의 패키지여행으로 캄보디아를 방문하게 되었다. 요즘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072라는 여행 사이트가 있었다. '땡처리'를 숫자로 표현해 놓았던 여행 사이트. 여행 마감 2-3일 전에 취소된 자리 나 아니면 최소인원 규정으로 채워져야 하는 자리를 반값 혹은 반의 반값으로 팔던 사이트였다. 엄마와 이모, 나는 셋이서 4박 6일 39만 원에 모든 것이 다 포함 ‘올 인클루시브’라는 획기적인 가격으로 크리스마스 연휴에 캄보디아를 방문하게 된다.
요즘은 달라졌을지는 몰라도 그때만 하더라도 패키지여행이라 함은 관광지 방문과 함께 쇼핑센터 방문은 필수였고 그 외의 여러 가지 옵션 관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동남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었던 옵션 관광 중 하나는 마사지였다. 옵션이라고는 하지만 옵션을 참여하지 않으면 가이드의 눈치를 봐야 하거나, 애매하게 홀로 여행 중간에 시간이 비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때 캄보디아 패키지여행에서 옵션 관광으로 경험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발마사지였다. 커다란 방에 끝이 안 보이는 흡사 공장 같은 크기의 건물에서 우리는 마사지를 받았다. 엄청나게 큰 건물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마사지 의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검은색 인조 가죽 같아 보이는 마사지 의자에 앉자 딱 한눈에 봐도 건장해 보이는 아저씨가 나에게 다가와서는 ‘안녕하세요.’ 한국어로 인사를 하더니 물어왔다. ‘세게?, 살살?’.
그리고 아저씨는 마사지를 시작했다. 그때의 마사지가 어땠는지 기억해보려고 해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좋았던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리고 ‘왜’ 좋았는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내가 기억하는 거라고는 마사지를 받는 동안 너무 좋아서 마사지가 끝나고 나서도 그 푹신한 인조 가죽 의자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는 것, 그리고 마사지를 받고 있는 동안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뿐이다.
그 이후로 마사지는 나의 취미, 나의 덕질이자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뻔질나게 기회 (돈+시간) 가 될 때면 마사지 샵들을 찾아다녔다. 내가 마사지에 쓴 돈만 모았어도 차 한 대는 거뜬히 뽑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소비에 후회는 없다.
나는 일단 웬만한 물건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옷에 욕심이 없다. 와이셔츠 다섯 장 그리고 두 종류의 정장 바지를 일 년 내내 출근일마다 돌려 입는다. 화장품에도 관심이 없다. 출근 전 아침은 빠듯해서 일어나서 씻고 선크림만 발라도 감지 덕지이다. 코로나로 인해 2년 넘게 마스크를 쓰다 보니, 관심 없던 화장에 더 관심이 없어졌다. 맛집에도 관심이 없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배고프면 뭐든지 맛있다. 그리고 나는 자주 배고프다. 좋은 차도 욕심이 없다. 아니, 아예 차라는 것에 대한 욕심이 없다. 요즘은 10km 남짓의 출퇴근 길을 조그마한 전기자전거를 타고 오고 간다. 휘발유가 1200원이 넘어가는 이 고유가 시대에 들어오고 보니 선구안적인 결단이었던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의 욕심을 당기는 것에 변변한 물건은 없다. 내가 욕심이 있는 것은 다양한 경험들인데, 그 중의 가장 큰 욕심을 부리는 것은 마사지이다.
세상에서 존재하는 여러 가지 마사지를 다 받아보고 싶다!
가끔 가다 일과 사람에 치일 때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렇게 열심히 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마사지를 받으러 가면 된다. 마시지 샵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마사지를 받는 순간, 그 순간에는 ‘그래, 내가 이 마사지를 받으려고 열심히 살지’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보다 더 많은 시간 외국에서 살게 된 지 올 해로 어느덧 11년이 지났다. 코로나 전에는 출장도 참 많이 다녔다. 어느 도시에 출장을 가게 된다 혹은 살러간다 싶으면 나는 구글 맵을 제일 먼저 킨다. 예전에는 론리플래닛 (여행책)을 주로 훑어봤다면 요즘은 인터넷에 어쩜 그렇게 양질의 정보들이 많은지 그곳에서 ‘스파 spa’, ‘마사지 massage’ 등의 키워드를 검색해본다. 검색 결과 나오는 장소들의 평점을 재빠르게 훑어보고, 사진이 나와있다면 가게들의 사진들을 유심히 살펴본다.
새로운 곳에 간다고 해도 그곳의 식당은 찾아보지 않는, 세상 게으른 것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내가 이러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은 그것을 진짜로 좋아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물론 리뷰의 평점과 사진들로 보이는 정보가 항상 맞는 건 아니다. 하지만 리뷰 사진에서 최소한의 것들을 볼 수 있다. 마사지 샵이 너무 고급스러울 필요는 없지만 방안에 히터나 난방시스템이 있는지가 중요하다. 마사지는 옷을 한거풀 벗고 가만히 누워서 혹은 앉아서 움직임 없이 받기 때문에 방 안의 온도가 매우 중요하다. 더운 곳에는 열사병에 걸리는 것처럼 너무 기진맥진해질 확률이 높고, 추운 곳에서는 근육이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어서 받고 나왔을 때 더 찌뿌둥할 가능성이 높다. 그다음으로 내가 유심하게 보는 것 중 하나는 화장실이다. 사진 속 화장실이 깨끗하다면 십중팔구 마사지받는 공간도 깨끗할 확률이 높다. 그리고 구글 리뷰도 유심히 찾아본다. 한국인이 남긴 리뷰가 있다면 왜인지 더 믿음이 간다.
나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면 이곳저곳에 흩어져있는 나의 단골 마사지샵들이다. 나의 일산 동네에 있던 경락마사지샵 (피부관리는 덤으로 받을 수 있었다).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바닷가가 보이던 리조트에서 있던 마사지샵 (첨벙 대는 파도소리가 가깝게 들리던 그곳에서는 배경음악을 틀어놓을 이유가 없었다). 인도 뉴델리 커다란 6층짜리 쇼핑몰에 있던 어두컴컴한 마시지샵 (마사지 메뉴 중에는 hang-over treament 숙취 전용 마사지가 있었다). 네팔 카트만두 King’s way 가장 중심가에 있던 대체의학 마사지 샵 (가게에 들어가면 정면의 벽에 해골이 걸려있었다). 영국의 글라스톤베리, 캄보디아의 씨엠립과 프놈펜, 태국의 방콕, 치앙마이, 그리고 빠이, 중국의 상하이, 그리고 부탄의 팀푸와 푸나카까지.
“어른이 되면 뭐가 되고 싶어?”라는 질문에 현재 나의 대답은 "마사지받고 싶을 때 주저하지 않고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조금 더 큰 바람이라면 주변 사람들에게도 마사지권을 부담 없이 선물할 수 있는 – 플렉스 flex 할 수 있는 - 경제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여유로운 어른이 되는 거랄까? 그렇다, 나는 여유는 지갑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유물론적 사람이다. 부담 없이 호텔 마사지를 받으러 갈 수 있을 때까지 조금만 더 열심히 일하자, 나. 힘내라,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