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야크 Sep 15. 2022

인생 숙취 이후 만난 인생 마사지

부탄의 핫스톤 마사지

살다 보면 인생에서 그런 밤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엄청나게 시끌벅쩍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 밤들 말이다. 아니다, 처음부터 다시 찬찬히 이야기를 해야겠다. 나는 2020년 겨울, 인도와 중국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히말라야 산속의 나라, 부탄에 가게 되었다. 그것도 어쩌다 보니 일을 하러. 부탄에 도착하고 보니 인구 70만의 조그마한 나라는, 수도라고 부르는 도시조차 우리나라의 조그마한 동네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 사는 한국인의 숫자는 열 손가락으로도 다 꼽을 정도로 적었다. 부탄인 남편과 결혼해서 한국 식당을 하시는 L언니, 그리고 한국의 무상원조 기관에서 파견되어 가족과 함께 지내는 K 언니와 H 형부, 그리고 귀여운 조카 J. 부탄의 양궁 국가대표 코치로 일하고 계신 H 선생님. 부탄에서 수력발전소를 짓고 있는 Q 소장님까지. 대사관도 영사관도 없는 타지에서 적은 숫자의 한국인들이 모여사는 터라 우리는 그곳에서 더욱더 돈독해졌다. 명절 때면 같이 명절 음식을 해 먹고, 식목일날에는 같이 나무를 심으러 다니면서 부탄에서의 조그마한 한인 커뮤니티를 만들어갔다.


금요일 밤, 한국인들끼리 모여서 한국식당에서 신나게 삼겹살과 맥주를 마시다가 이 흥을 이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일 인지 그날은 모두가 쿵짝이 잘 맞았다. 결국은 식당의 영업을 마칠 때까지 맥주를 마시다가 식당 영업을 마치는 시간에 맞춰 한식당 사장님인 L언니네로 놀러 가서 ‘딱, 한잔만’ 더 하기로 했다.


‘딱, 한잔만 더’라는 말은 얼마나 위험한 말인가. 딱 맥주 한잔만 더하자는 약속은 온데간데없이 그곳에서 우리는 셀 수 없는 맥주병을 비우고, 이제 위스키 병을 꺼내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했다. 부탄의 대표 위스키, K5. K5는 현재 5대 국왕인 지그메 케샤 왕추크의 애칭이기도 하다. 국왕의 애칭을 딴 위스키라니 성스럽고 귀엽다. 어쨌든 K5는 싱글몰트 위스키인데, 원액(spirit)을 스코틀랜드에서 가져와 히말라야의 맑은 물을 섞어 유럽의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위스키이다. 그래서 그런지 술맛이 엄청 좋았다. 지구는 둥글고, 앞으로 걸어 걸어가다 보면 우리는 모두 만날 수 있다는 세계화를 부탄의 K5 위스키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흥겹게 술을 마시는 중, 부탄에서 가장 오래 산 L언니가 동네에서 가장 좋은 마사지샵이라고 ‘베이 두르야 Vaidurya 마사지샵’을 추천해주었다. 베이 두르야는 여러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가장 넓게 이해되는 것은 아주 특별한 보석이라는 뜻이다. 고양이의 눈이라고도 불리는데, 푸른 사파이어의 색을 가진 보석을 의미한다. 고급의 베이 두르야는 돌 안에서 청명한 밤하늘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베이 두르야 마사지샵은 부탄의 전통인 핫스톤 마사지를 하는 곳인데, 핫스톤 마사지와 함께 마사지사들이 등을 밟고 올라가서 두뚝두뚝 뭉친 부위를 풀어준다고 했다. 핫스톤 마사지는 불로 뜨겁게 데워진 돌을 마사지사가 손으로 잡고 그 온기를 이용해 마사지를 하거나, 마사지를 받는 사람의 몸 위에 올려놓는 마사지이다. 돌의 따스한 온기는 몸의 근육의 긴장을 풀고, 원적외선을 방출해 통증 완화에 탁월한 효능을 지니고 있는 마사지라고 했다. 술을 먹고 나서 흥이 넘쳐흐르던 K언니와 나는 말이 나온 김에 내일 오전에 함께 마사지를 받으러 가기로 하고 그 김에 마사지샵에 전화를 해서 두 사람의 마사지를 예약도 해놓았다.


그날 아주 술이 거하게 취한 채로 집에 와 잠이 들었다. 술을 많이 마시게 되면 선잠을 자기 일 수이다. 그날 밤은 속이 울렁거려서 30분마다 깨고, 목이 말라서 1시간마다 깨고, 머리가 아파서 또 깨고 그러다가 새벽녘에야 어렵게 잠이 들었다.


잠을 잔 건지 만 건지 모르는 상태로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나를 맞이하는 것은 ‘망했다’라는 느낌. 술꾼들은 알 것이다, 그 느낌을. '망했다. 정말로 망했다.' 그날 아침 내 인생 최악의 숙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소주에, 맥주에, 위스키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양을 섞어마셨으니 내 속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지만, 사실 어제 먹은 것들은 어제 이미 다 소화가 되어서 토로 나올 것은 없었다. 헛구역질만 계속 나왔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속은 울렁거리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아, 여명과 컨디션도 구할 수 없는 산골의 나라 부탄. 하지만 약속시간이 되어 집 앞까지 데리러 와준 K언니와 겨우 10시간 전에 했던 약속을 깰 수는 없었다. ‘내가 다시 술을 먹으면 사람이 아니다’를 되뇌며 일단 옷을 갈아입고 우주의 온 기운을 모아 정신을 잡고 집 앞에 데리러 온 언니의 차를 타고 마사지샵으로 향했다.


병원인지 마사지샵인지 모르겠는 오묘한 분위기를 가진 마사지 가게는 들어서자마자 문 앞에 마사지샵 주인과 부탄의 보건부 장관이 함께 서있는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 옆에는 부탄의 큰 스님들의 사진들과 함께 사람의 몸에 있는 혈자리들을 설명해 놓은 큰 인쇄물이 보였다. 우리가 아는 마사지 샵과는 다른 분위기이다. 차라리 개인병원이라고 하면 더 어울릴 것 같은 녹색 벽에 조그마한 방들이 일렬로 줄지어 서있다.


나는 숙취로 창백해진 얼굴로 마사지샵으로 들어갔다. 일단, 여섯 개의 방 중 하나에 들어가 의자에 앉아있으면 곧 마사지사가 큰 대야에 아로마 오일을 몇 방울 떨어트린 따듯한 물을 가지고 들어와 족욕을 해준다. 족욕을 해주면서 마사지사는 오늘 마사지에서 집중했으면 좋겠는 부위와 통증이 있거나 마사지를 할 때 조심해야 할 부위 등을 물어본다. 간단한 설문조사와 함께 족욕이 끝나면 팬티를 제외한 모든 옷을 다 벗고 마사지 침대로 올라가 엎드려 눕는다.


엎드려 눕는데, 식도 저 깊은 곳에서 신트림이 올라왔다.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내 잔잔하고 몽환적인 음악이 방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잔잔한 음악은 내 속을 진정시키는 듯싶다가도, 내 몸과 세상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허리부터 따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오일 마사지였는데, 오일도 따듯하게 데워서 마시지를 해주는 섬세함을 지닌 곳이었다. 온몸의 세포들이 노곤 노곤해지는 느낌이 났다. 하지만 그러한 느낌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종아리에 통증처럼 뜨거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부탄은 핫스톤 마사지와 핫스톤 스파가 유명하다. 이곳 또한 핫스톤 마사지가 유명한 곳이었다. 손바닥 크기의 반질반질한 돌을 끓는 물에 담가서 뜨겁게 데운 뒤, 대야에 넣어서 가져왔다. 8개의 돌을, 하나는 왼쪽 종아리에, 하나는 오른쪽 종아리에, 나머지 세 개는 등에 일렬로 올려놓는다.


그리고 돌 하나를 손에 쥔 채 빠르게 나의 오른쪽 팔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픈데, 아프지 않고 뜨거운데 뜨겁지 않은 그 느낌. 대체의학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하고, 무언가의 에너지가 있다는 사실을 완전하게 믿지는 못하지만 그날따라 뭔가, 뭔가 그 돌들에게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따듯한 돌로 온 몸을 문지르고 난 뒤, 천천히 목과 어깨부터, 등, 고관절, 엉덩이, 다리, 그리고 팔까지 오일 마사지가 시작되었다. 따듯한 오일이 피부를 만지고 지나갈 때마다 몸이 자꾸만 해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중력이 있지도 없지도 않은 상태. 물속을 유영하는듯한 그런 느낌.


그러다, 갑자기 마사지사가 나의 귀에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혹시 내가 등에 올라가서 밟아도 되겠니? Can I walk on your back?”


한 번도 누구에게 밟혀본 적 없는 등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마사지를 받고 나면 아주 세상 시원하다는 경험자들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자그마한 체구의 마사지사는 마사지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올라오더니, 내 등에 올라섰다. 올라와서 발가락이 있는 발의 끝부분을 이용해서 자근자근 내 등을 밟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왜 그렇게 할머니랑 삼촌이 나한테 등에 올라가서 밟아보라고 했는지 알겠다. 이건 손으로 누르는 압과는 차원이 다른 압력이다. 헉, 소리가 났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마사지사인 그녀는 너무나 가벼웠다. 사뿐사뿐, 그녀가 스스로 중력을 조절한다 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마사지의 마지막 코스는 얼굴과 두피 마사지이다. 피부관리실처럼 빠르게 손가락을 이용해서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얼굴을 챱챱챱 올려주다가, 감고 있는 눈꺼풀 위에 검지와 중지를 살며시 올려 시계방향으로 세 번, 반시계 방향으로 세 번 문지른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눈을 마사지하는 건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러고 나서는 두피 마사지를 시작했다. 관자놀이를 지긋하게 누르고는 열 손가락을 이용해서 빠르게 쓱싹쓱싹 소리가 나게 두피를 마사지해줬다.


90분의 마사지를 다 받고 나오자, 마사지샵 응접실에는 우리나라의 에이스 맛이 나는 비스킷 세 개와 녹차 한잔이 가지런히 준비되어있었다. 응접실에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옆에 있는 전신 거울을 보는데.. 오일 마사지라 얼굴은 번들거리고, 머리는 1920년대 사진 속 정갈하게 쪽진 증조할머니의 머리 스타일이 되어있었다. 거울을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적나라한 나의 못생긴 모습. 하지만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면서 K언니는 마치 목욕탕에 몇 시간 있다 나온 거처럼 얼굴이 뽀득하고 맑아졌다고 했다. 아, 이게 나의 맑은 모습이구만.


그리고는 중국집으로 가서 다 같이 해장을 하기로 했다. 부탄의 수도인 팀푸에서 유일한 샤부샤부 집. 각종 채소를 넣고 우려낸 국물에, 닭고기를 우려낸 국물을 한 모금 넘기니깐, 시원한 맥주 한잔이 생각나는 건 뭘까.. 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이후 그 마사지샵은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한 단골 마사지 샵이 되었다. 하도 자주 마사지를 받으러 가자, 너무 자주 마사지를 받으면 근육 형성을 막는다는 잔소리에 주중에는 참고 참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마사지를 받으러 가고는 했다. 나중에는 마사지 예약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걸면, 내 목소리만 듣고 “미스 킴? 나인티 미닛 (90분)?” 하고 물어보던 직원들. 사뿐사뿐 내 등위를 밟고 다니던 팅커벨 같은 마사지 샵 직원들이 그립다.

매거진의 이전글 머리에서 자꾸만 노란색 물이 나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