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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크 Sep 15. 2022

머리에서 자꾸만 노란색 물이 나와

부탄 팀푸의 가정 미장원에서 받은 머스터드 오일 마사지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우리 동네에는 동네마다 가정집에서 영업하는 미용실이 여러 군데 있었다. 동네 아줌마들의 사랑방이자 만능 샵과 같은 곳. 평범한 가정집인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생활과 영업의 공간이 미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던 곳. 그곳 거실에는 텔레비전을 놓는 장식장 위에는 여러 가지 박스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고는 했다. 염색약에서부터 비타민, 몸에 좋다는 건강기능식품들까지.


그곳은 미용실인데 기본적인 커트와 파마, 염색 이외에도 눈썹 정리도 해주고, 제모도 해주고, 마사지도 해주고, 그리고 가끔은 눈썹 문신도 해주는 그런 곳이었다. 우리 할머니의 30년째 지워지지 않는 숯검댕이 눈썹 문신도 가든 아파트 303호 미용실 아줌마의 작품이었다. 사실 법을 기준으로 보자면 그다지 허용되지는 않는 어둠의 영역이었던 것 같지만 말이다.


요즘에는 한국에서는 그런 곳들이 많이 없어진 것 같다. 하지만 부탄에는 여전히 그런 가정 미용실들이 많다. 내가 부탄의 수도인 팀푸에서 살았던 5층짜리 아파트 건물의 2층에도 그런 가정 미용실이 있었다. 방 2개짜리 가정집에서 방 하나를 미용실로 쓰는 집이었다. 제대로 된 간판도 없이, 유일한 표식이라고는 집 현관문 앞에 붙어있던 흰색 A4용지에 인쇄된 미용실 살롱 Salon이라는 단어 하나였다. 가게의 이름도 따로 없었다. 그냥 Salon 미용실. 그래도 A4용지에 컬러 인쇄가 되어 있었던 거 보니 미용실 언니가 나름의 신경을 썼던 것 같다.


가게의 이름이 따로 없으니, 미용실 주인 언니의 이름을 따서 그 미용실을 푸남네 미용실 Poonam’s salon이라고 부르겠다. 푸남은 미혼모로 8살짜리 아들을 기르면서 그곳에서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원래는 팀푸의 다른 지역에서 따로 공간을 가지고 미용실을 운영했었는데, 그 가게를 팔고 그 돈으로 이 동네로 이사를 왔다고 했다. 지금 사는 이 동네가 아들을 기르기에, 그리고 아들 교육에 더 좋은 동네라고 했다. 부탄도 한국과 다르지 않게 맹모삼천지교가 있는 곳이었다.  


푸남네 미용실은 안 되는 게 없는 곳이었다. 머리를 자르고, 염색하고, 파마하는 미용실의 기본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눈썹 정리와 제모도 해주고, 그리고 마사지도 해주는 진정한 멀티숍이었다. 머리를 자르는 데는 3천 원, 실을 이용해서 다듬어주는 눈썹 제모는 1천6백 원. 푸남네 미용실에는 여러 가지 마사지 코스가 있다. 물론 모든 메뉴는 구전으로만 내려온다. 직접 과일을 사다가 갈아서 얼굴에 붙여주는 생과일 페이셜 마사지는 2만 5천 원. 인도에서 온 뷰티 제품으로 해주는 피부 마사지는 2만 원. 목과 어깨의 근육 딥티슈 마사지는 1만 6천 원. 하지만 딥티슈 마사지는 받고 싶을 때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푸남의 컨디션에 따라 받을 수 있는 날도, 받을 수 없는 날도 있다.


어느 날, 푸남네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고 있었는데, 푸남이 갑자기 나에게 두피와 머리카락에 영양을 줄 수 있는 '머스터드 스페셜 오일 마사지'를 하지 않겠냐며 영업을 해왔다. 머릿결이 많이 상한 것 같다면서 머스터드 스페셜 오일을 마르면, 머릿결이 정돈이 되고, 큐티클이 없어지고 그리고 두피 모공에 남겨져있는 불순물도 제거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머스터드 오일 마사지의 가격은 단돈 8천 원. 스페셜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 치고는 많이 저렴한 가격이었지만, 시도해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나의 집은 미용실에서 3개 층만 올라가면 되는 같은 아파트 건물이 있었기 때문에, 머리에 오일을 덕지덕지 발라도 창피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된 머스터드 스페셜 오일 마사지.


나는 머스터드 스페셜 오일 마사지가 머스터드 오일이 들어가 있는, 혹은 머스터드 오일을 베이스로 한 기성 제품으로 하는 두피 마사지 일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이 마사지는 정말 쌩 머스터드 오일로 하는 마사지였다. 우리가 요리할 때 쓰는 그 머스터드 오일. 머스터드 씨에서 추출한 순도 100퍼센트의 기름. 그 기름으로 하는 마사지였다.


머스터드 오일은 약간 콩 식용유보다는 진한데, 참기름보다는 연한 노란색이었다. 영어로야 머스타 드지 한국으로 하면 겨자씨. 정말 아, 저기서 겨자가 나오는구나 싶은 딱 그 색깔. 푸남은 생수 페트병에 들어있는 겨자씨 오일을 자신의 한 손바닥을 움푹하게 만들어 그곳에 따라내었다. 그리고는 다른 한 손을 이용해 내 머리 한 올 한 올에 듬뿍 아끼지 않고 바르기 시작했다.


아뿔싸, 알싸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렇다, 머스터드 냄새… 겨자 냄새가 오일에서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고추냉이처럼 눈물이 날 정도까지는 알싸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 머리카락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아닌 알싸한 머스터드 냄새가 난다는 게 약간 당황스럽기 시작했다.


하지만, 푸남은 정말 정성껏 내 머리카락에 한 올도 빼놓지 않고 머스터드 오일을 바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손에 머스터드 오일을 잔뜩 묻혀서 두피 마사지를 시작했다. 나는 푸남을 믿었기에 뭐, 내 머리에서 알싸한 향신료의 냄새가 난다 해도 괜찮았다. 푸남은 나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한 30분 정도 기다리다가 머리를 감으라고 조언해줬다. 그리고는 비닐랩으로 내 머리를 꽁꽁 싸매어줬다.


문제는 집에 돌아오고 나서부터였다. 기분 탓인가, 머스터드 오일이라서 그런가 두피가 화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몸 곳곳에서 진득하고 미끌거리는 머스터드 오일이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푸남의 조언대로 30분을 기다리다가 머리카락을 감기 시작했다.


맙소사. 머리를 감는데 머리에서 노란색 기름이 줄줄 떨어지기 시작했다. 화장실 바닥의 하얀색 타일은 미끈거리는 것을 넘어서 노란색 기름으로 떡칠이 돼가고 있었다. 뭐,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정신을 부여잡고 머리를 샴푸로 감고, 빗질을 하면서 머리카락과 두피에 남아있는 기름을 제거했다. 한참의 샴푸질을 끝내고 나와서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리는데, 머리는 여전히 기름을 떡져있었다. 머리카락을 말려도, 말린 것 같지가 않았다. 물에 젖은 미역처럼 기름에 떡져서 축 쳐져있는 머리카락. 너무 놀라서, 다시 머리카락을 감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샴푸의 양도 두 배로, 그리고 뜨거운 물과 찬물을 번갈아가며 머리카락을 헹궈냈다. 하지만, 머리를 말려보니 여전히 기름 범벅인 머리.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너무나 정성스럽게 기름에 적셔져 있어서인가 뜨거운 물조차 그 기름막을 뚫고 들어가지 못한 것 같았다.


도저히 그 상태로는 침대 위의 베개에 내 머리를 눕힐 수 없을 것 같은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은 그날 밤에만 나는 머리카락을 3번 감았다. 나중에는 샴푸질 하느라 양팔이 아파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며칠은 머리에서 자꾸 기름이 올라왔다. 이게 내 몸에서 나오는 건지 아니면 내 두피 모공 어디인가에 숨어있던 겨자 오일이 다시 기어 나오는 건지 알 턱이 없었다. 회사에서 키보드 타자를 치고 있으면 어딘가에서 알싸한 겨자 향이 맡아지고는 했다.


얼마 후 아파트 입구에서 푸남을 만났다. 푸남은 활짝 웃으며 나에게 머스터드 스페셜 오일 마사지가 어땠냐고 물어봤다. 너무나 확신에 찬, 그리고 대답을 기대하는 소남의 얼굴 앞에서 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어메이징 하고, 베리 굿 했으며 머리카락은 베리 실키 해졌다고.


여전히 나는 푸남네 미용실의 단골이며, 2주에 한번 미용실을 방문해 눈썹 정리를 하고 두 달에 한 번씩은 커트를 한다. 내가 미용실을 찾을 때마다 푸남은 머스터드 스페셜 오일 마사지를 추천하고는 했지만, 나는 웃으며 자연스럽게 거절하고는 했다.


전 세계를 강타했던 코로나에서 이 히말라야 산속의 작은 왕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탄은 코로나 시작 이후 5번의 봉쇄 lock-down을 겪었다. 짧은 것은 일주일이기도, 긴 것은 두 달 동안 지속되고는 했다. 이러한 봉쇄에서 가장 큰 피해를 받았던 것은 푸남과 같은 소상공인들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나라에서는 다른 세계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여기저기에서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반 값만 받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런 건물주들을 위해서 정부는 건물을 지을 때 빌려간 돈에 대한 이자를 1년간 감면해주었다.

 

당시 나는 회사에서 다른 정부 원조기관, 그리고 신문사와 함께 의사, 간호사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코로나 극복을 위해 하는 노력들을 소개하는 커뮤니케이션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었다. 누구나 코로나 극복을 위해 일하는 평범한 최전선의 사람들 frontline worker이라는 취지를 가지고 시작한 캠페인이었다.


캠페인을 통해서 우리는 50여 명의 사람들을 인터뷰했고, 그들의 이야기를 매주 신문에 실었다. 그중에는 봉쇄로 말이 묶인 환자들에게 발이 되어주는 택시기사, 봉쇄기간 중 고인이 되신 분들의 관을 나르고, 화장장을 운영하는 적십자회 회원, 봉쇄 중 24시간 SOS 핫라인을 구축해 상담을 제공하는 정신과 의사, 문을 닫은 은행 대신 은행의 역할을 해주는 골목가게 사장. 그리고 푸남의 이야기도 있었다.


푸남은 아들을 위해 매 달 1000루피씩 적금을 한다. 우리나라 돈으로 1만 7천 원 남짓한 돈이지만, 나중에 아들이 대학교나 사립학교에 진학하게 될 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푸남은 봉쇄가 시작되고 나서 쌈짓돈이 생길 때마다 나라에서 개설한 코로나 극복을 위한 모금 계좌에 300루피씩 기부를 한다고 했다. 지난 한 달 동안의 한 명의 손님도 받지 못했던 푸남에게는 300루피도 큰돈이었을 것이다. 부탄의 많은 사람들이, 푸남과 같았다. 코로나 극복 펀드는 개설된 지 한 달만에 10억이 넘는 큰돈이 모였다. 그리고 이 돈은 나라에서 코로나 대응 활동을 하는데에 쓰였다.


푸남의 사진과 인터뷰가 신문에 실리고 난 뒤, 푸남에게 서툰 영어로 문자가 왔다.


“Thanks you, Madam. I saw my photo on newspaper today. Only important people on newspaper. I am very happy. I feel so good memory. Thanks you very much. Forever thanks you”


아마 이런 뜻이었을 것이다.


고마워, 오늘 아침에 신문에서 내 사진을 봤어. 신문에는 유명하고 중요한 사람들만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나와서 너무 기뻐. 기분이 좋아. 고마워. 평생 고마워할 기억일 거야.


내가 오히려 고맙다. 푸남에게서 배운 점이 많다. 돈이 전부가 아닌 세상, 가진 것이 적어도 베풀 수 있는 진심까지. 이런 경험을 할 수 있게 해 준 그녀에게 내가 오히려 고마울 다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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